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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좋은생각

[햇살마루]풀 짐을 진 아버지

며칠 전에 시골집에 다녀왔다. 아버지의 생신을 맞아 가족이 한자리에 모였다. 아버지는 1939년생이다. 연로하지만 평생 농사일을 하여 몸은 단단하다. 시력이 많이 떨어져 여기저기 다니는 데에는 불편이 있다. 나도 어느덧 중년이, 둘째 아이가 성년이 되고 보니 아버지가 지금 내 나이 즈음했을 때의 일이 더러 생각난다.

 

최근에 우연하게도 내 대학교 입학식 사진에서 아버지를 발견하고 다소 놀랐다. 사진 속 아버지는 새 양복을 차려입고 갈색 구두를 신고 가르마를 탔는데 그 풍채가 무척 당당하고 꼿꼿했다. 마치 둘레가 큰 나무처럼, 바위처럼, 전방을 주시하면서. 등이 구부정하고 혈색이 좋지 않은 나와는 딴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는 늘 지게를 졌다. 나는 아버지가 저녁 무렵에 풀 짐을 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풍경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는 풀 짐을 지고 오시네/ 암소는 풀 짐 진 아버지보다 앞서 집으로 돌아오네/ 아버지는 암소에게 물을 먹이고/ 아버지는 암소에게 풀을 먹이네/ 암소의 워낭 소리가 잔잔하게 들려오네/ 초저녁의 물결 위로 흘러오네/ 아버지의 어둑어둑한 하늘 속으로 들어가네.

 

내가 쓴 시 <아버지와 암소>다. 소를 앞세워 집으로 돌아오면 아버지는 소에게 물을 먹이고, 베어 온 풀을 먹였다. 물을 마시고 풀을 먹는 소의 턱 밑으로 늘어진 방울이 잘그랑거리는 소리가 참으로 평화스럽게 들렸다. 세상에 그처럼 평온한 소리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시골 동네 사람들이 아버지를 두고 말하길 법 없이도 살 양반이라고 한다. 내가 봐도 아버지에겐 법이 필요하지 않겠다 싶다. 거짓말할 줄 모르고, 남을 속일 줄도 모르고, 돈을 빌릴 줄도 모르고, 신세를 끼치는 일을 하지 않으니 구태여 무슨 법이 필요하겠는가.

 

어미 소로부터 갓 태어나는 송아지를 받아 낸 분이니 생명을 해치는 일도 할 줄 모른다. 집에서 기른 병아리나 토끼가 죽은 날에 내가 울고 있으면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산기슭으로 가서 그것들을 나무 아래에 묻어 주었다. 자전거 뒤에 나를 태워 이십 리 떨어진 김천 시장에 가서 하얀 토끼를 사 준 분도 아버지였다. 말은 없었으나 내게 깊은 신뢰를 보여 주었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내가 아버지로서 하고 있는 일을 돌아보게 된다. 나는 모자란 게 너무 많다. 어쨌든 이제 아버지는 나이가 들었고, 잠이 많아졌다. 틈만 나면 모로

누워 눈을 붙이고 잠에 빠져든다. 나에 대해 궁금한 게 많을 텐데 그 궁금증도 잠시 밀쳐 두고서.

 

아버지는 잠이 많아지네/ 시든 풀 같은 잠을 덮네/ 아버지는 일만 가지의 일을 했지/ 그래서 많고 많아라, 아버지를 잠들게 하는 것은/ 누운 아버지는 늙은 오이 같네/ 아버지는 연고를 바르고 또 잠이 들었네/ 늙은 아버지는 목침 하나를 덩그러니 놓아두고/ 잠 속으로 아주 갈지도 몰라/ 아버지는 세상을 위해 일만 가지의 일을 했지/ 그럼, 그렇고 말고!/ 아버지는 느티나무 그늘이 늙을 때까지 잠잘 만하지.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쓴 시 <아버지의 잠>이다. 자꾸 잠이 많아지는 걸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겨울날 새벽이면 잠자는 가족을 위해 아궁이에 장작을 더 때고, 농사철 새벽이면 들에 가 일을 하고서야 아침을 먹은 아버지였다. 동네에 소도둑이 들었을 때 밤새 소를 지키고, 장마가 들면 밤을 새워 논의 물고랑을 살폈다. 한시라도 집에 들어앉아 있지 않던 아버지였다. 

 

농사일이 없는 겨울철에는 산에 가서 나무를 해서 팔거나, 막노동을 하러 공사판에 나갔다. 약국조차 다닌 적 없는 아버지가 입원한 일은 가족 모두에게 충격을 줄 정도였다. 이제 아버지는 기운이 훨씬 더 떨어졌다. 하루하루가 다르다. 쟁기를 지고 들일을 하러 가는 아버지는 옛 기억 속에만 있다. 둘레가 큰 나무처럼, 바위처럼 당당하게 꼿꼿하게 서 있던 아버지는 어디로 간 것일까. 풀 짐을 가득 진 내 아버지는 어디로 간 것일까.

 

문태준 님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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