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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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좋은생각

[햇살마루] 말은 안 되지만

한가한 오후였다. 관리 사무소에서 방송을 했다. 근처 경찰서에서 직접 우리 아파트를 찾아와 자전거에 도난 방지용 인식표를 달아 준다는 거였다. 인식표를 부착하고 싶은 주민은 자전거를 가지고 정문 경비실 옆으로 나오라는 내용이었다.

 

우리 집에도 자전거가 두 대나 있으니 귀가 솔깃했다. 살면서 두어 번 자전거를 도둑맞은 경험이 있다. 그런 경험을 한 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멀쩡하게 있던 자전거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때 느껴지는 비현실감 말이다. 

 

자전거 혼자 산책이라도 갔나. 조금만 기다리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제자리로 돌아올 것만 같은데 뒤늦게 현실을 인정하면서 느껴야 한 씁쓸함이 떠올랐다. 그런 일을 다시 겪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타고 다니는 자전거 하나, 아이가 타고 다니는 보조 바퀴 달린 자전거 하나. 이걸 어쩌나. 마침 집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한꺼번에 두 대를 끌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고 하나씩 갖고 가자니 번거롭기도 해서 일단 인식표라는 게 뭔지 알아나 보자는 생각으로 집을 나섰다.

 

발 빠른 한 가족이 자전거 두 대를 가지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경찰 두 명이 주민 못지않게 어색한 표정으로 서 있는데 한 사람은 대체 어느 시대 유물인가 싶은 오래된 검은색 클립보드를, 다른 한 사람은 고리로 연결된 플라스틱 인식표 한 무더기를 들었다.

 

두 경찰은 서로 존대를 해 가면서 인식 번호와 자전거의 차대 번호를 불러 주고 받아 적고 다시 확인한 뒤 인식표를 자전거 몸통에 부착하는 식으로 일했다. 계급은 경사인 듯했는데 한마디로 일선 현장에서의 경험이 풍부한 관록 있는 경찰들이었다.

 

잠깐 사이에 주민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자전거를 끌고 달려온 사람, 나처럼 일단 무슨 일인지 알고나 보자며 맨손으로 나온 사람 등등이 처음 도착해 기다리던 한 가족과 경찰을 에워싸며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았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여간 실망한 게 아니었다. 인식표라는 게 노란색 플라스틱에 큼지막하게 동네 이름이 새겨진 데다 케이블 타이로 부착하는 거라 너무 눈에 띄고 별로 견고해 보이지가 않아서였다. 에워싼 사람들을 쭉 둘러보니 대체로 나와 비슷하게 느끼는 것 같았다. 

 

시험대에 오른 첫 번째 가족도 난감해하는 표정이었는데 무를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이 유난스러운 인식표를 자전거의 어느 구석에 부착해야 최대한 눈에 덜 띌까를 고민하는 듯했다.


두 경찰은 무심하게도 자신들의 일에만 열심이었다. 그러니까 아주 중대한 임무에 몰두하는 선량한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이 꼼꼼하고 끈질기게 그 일을 했다. 두 경찰은 많은 사람에 둘러싸인 터라 자부심과 보람으로 어깨가 살짝 굳은 상태였다. 

 

마침내 첫 번째 자전거에 인식표를 부착한 경찰이 몸을 일으키고 주위를 쓱 둘러보았다. 그러자 클립보드를 든 경찰이 동료를 치하하듯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이 동네에는 아직 자전거 도난 사건이 없습니다만, 벌써 세 건이나 있었습니다.” 경찰은 의기양양하게 주위를 살폈고 나 역시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인지 얼른 감이 오지 않았다. 도난 사건은 없었지만 벌써 세 건이나 있었다. 있다는 건지 없다는 건지. 경찰의 얼굴에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이 떠오른 것과 똑같이 사람들의 얼굴에도 그런 표정이 떠올랐다가 이내 사라졌다.  그러곤 말이 안 되는 이 말을 이해했다는 듯 사람들은 하나둘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경찰의 말실수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비록 볼품없는 인식표라 해도 도난 예방에 효과가 있으니 자신들을 믿어 달라는 뜻으로 헤아렸다. 노련한 두 경찰도 긴장을 풀고 다음 자전거에 몰두했다.


이스마일 카다레의 소설 가운데 한 장면이 떠올랐다. 망원경을 선물로 받은 소년은 종일 망원경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먼 곳도 보고 가까운 곳도 보고 거꾸로 뒤집어서도 보고……. 지루해진 소년은 망원경으로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기를 바랐다.


소년은 날마다 창가에 앉아 창밖을 바라본 할머니를 떠올리며 같은 자리에 앉아 할머니의 시선이 향하던 곳을 망원경으로 보았다. 마침내 소년은 할머니가 그 자리에서 본 게 저녁 풍경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당신의 마지막 날이 어느 쪽에서 오는지 추측하려 한 할머니의 마음속을 소년은 난생처음 보았다.


 

망원경으로 누군가의 마음속을 들여다본다는 건 말은 안 되지만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비록 말이 되지 않더라도, 아니 어쩌면 말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 말에 실린 진심을 더 분명하게 알아보는 경우도 있다. 나는 두 경찰이 아주 많은 자전거에 인식표를 부착하게 되기를 바랐다.
 

 

손홍규 님ㅣ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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