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카테고리

[특집] 바람처럼 자유롭게 별처럼 당당하게
2019.11.07   조회수 : 1,790    댓글 : 5개

가을장마와 태풍 링링이 지나고 일주일 만에 밭에 갔다비를 흠뻑 맞은 풀과 덩굴이 줄기를 쭉 뻗고 느긋하게 자라 있었다. “착착착착 착착착착.” 박자에 맞추어 낫질을 했다지난해에 급하게 일하다 손가락을 베인 뒤로 조심조심 낫질하는 기술이 늘었다내 손에 들린 호미나 괭이삽과 낫을 보면 어릴 적부터 들었던 여자가 무슨.”이란 말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난다.

 

첫 번째 기억은 엄마 손을 잡고 내복을 사러 간 때였다. “딸이 입을 내복 사러 왔어요.” 엄마 말에 가게 아주머니는 ‘7세 여아라는 스티커가 붙은 분홍색 내복을 보여 주었다나는 엄마 손을 당기며 분홍색 말고 파란색!” 했다아주머니가 얘기했다. “여자 내복은 다 분홍색이야.” 그럼에도 엄마는 파란색 내복을 사 주었다여자 색남자 색 따로 있는 게 아니라면서.

 

그 뒤로도 여자가 무슨.”이라는 말은 늘 나를 막아섰다초등학교에 들어가서도 축구를 하고 싶은 내 마음과 상관없이 여자아이라는 이유로 피구를 해야 했다남자아이들이 나를 축구에 끼워 주는 일은 거의 없었다.

옹기를 만들고 싶다고 하자 힘이 많이 든다며 도자기 정도가 어떻겠느냐는 말을 들었다한옥을 짓고 싶어 건축 현장을 기웃거리면 목수 아저씨가 여자가 할 일 아니다.” 라고 단호하게 말했다농사를 짓겠다고 했을 때에도 여자 혼자서는 어림없어.”라는 말을 듣고 또 들어야 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일 중에는 여자라서 안 되는 게 참 많았다더 이상 그런 말 때문에 원하는 일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농사를 시작할 때 가장 응원해 준 사람은 파랑 내복을 사 준 어머니와 아버지다부모님이 나를 믿어 준다는 사실은 쉽게 흔들리지 않는 울타리가 되어 주었다.

 

어느새 육 년째 산골 마을에서 농사지으며 산다나는 밭에 서 있는 내가 멋있다우리 식구가 먹을 양식을 스스로 심고 가꾸는 일이 내 삶을 더 당당하게 한다처음엔 물을 가득 채운 물뿌리개 하나도 제대로 들지 못해 비틀거렸다밭에 거름을 넣을 적마다 낑낑댔다동네 어르신들은 아이고젊은 아가씨가 그래 농사짓겄나?” 했다나는 여자라서가 아니라 안 해 본 일이라 서툴 뿐이라며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이런저런 몸살을 앓는 나에게 이웃 마을에서 십삼 년째 혼자 농사짓는 은실 이모가 나도 처음엔 그랬어.” 하고 말해 주었다무거운 거름 포대도 나르고삽질도 푹푹 시원하게 해내는 이모에게도 서툰 처음이 있었단다그 말이 얼마나 위로가 됐는지 모른다이제는 나도 일머리가 꽤 생겼다괭이질과 삽질을 잘한다는 말도 듣는다물뿌리개를 한 손에 하나씩 들고거름 포대도 손수레에 척척 실어 나른다.

 

그렇게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 한다홀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을수록 자유로워진다하지만 모든 걸 혼자 해내고 싶지는 않다사람은 누구나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살아가니 말이다여자라서가 아니라곁에 있는 한 사람으로서 도움 받는 것이면 좋겠다나는 언제까지나 산골 마을에서 바람처럼 자유롭고 별처럼 당당하게 살고 싶다여자라서 안 된다는 말을 한 삽 한 삽 뒤엎고그 자리에 환한 꿈을 심어 가꿔 나가고 싶다.

 

 김예슬 님 | 경남 합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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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5)

지리산 산청에서 그곳에 선돌이.
2019.11.10
삭제
좋다.
참좋다.
이 세상에
나를 아는 이와
모르는 이가 있는데
그대는 벌써 자신을 
알아버렸다.
웃음꽃
2019.11.11
삭제
바람처럼 자유롭게 별처럼 당당하게 살고 있는 예슬님을 응원합니다~♡
박윤정
2019.11.11
삭제
여자라서가 아니라
곁에 있는 한 사람으로서
바람처럼 별처럼 멋진 예슬님의 삶을
언제나 응원합니다~♡
정문희
2019.11.11
삭제
여자라서 안 된다는 말을 한 삽 한 삽 뒤집어가며
당당하게 살아가는 멋진 모습 응원합니다..^^ 

농사 짓는 일이 정말 어려운 일일텐데요..
자식을 키워내듯 정성이 많이 들어가더라구요..
그래도 정정당당히 땀 흘린만큼 수확하는 그 기쁨 또한 클 듯해요..
멋있습니다..진실된 그대의 삶이..^^ 
김문식
2019.11.20
삭제
시골에서 태어나 농사꾼의 자식으로 크다보면 자연스럽게 집안일을 돕게 되면서 농사라는 일의 버거움을 알게됩니다. 자랑스럽다거나 의미있는 일이라는 생각보단 그냥 피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도와야)만 하는 일이라는 것이 성인이 되기 전까지 제가 농사라는 직업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이었죠. 대부분의 도시인들이 말하는 '할 일 없으면 농사나 짓지' 라는 말에 어느정도 동조하면서.. 성인이 되고 나서 서울 직장생활을 접고 귀농 생활을 해보고 나서야 농사라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고 뜻깊은 일이었는지 뒤늦게서야 깨닿게 되더군요. 햇살과 물과 땅을 이해하는 과정이 그 어떤 공부보다 잼있는 일이고 어려선 그렇게 힘들고 짜증나던 일들도 노동을 하며 단련되다 보면 익숙해지고 별일 아니라는것도 알게되고.. 이제 저도 농사라는 직업을 정말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젊은 사람들에게 강추하는 사람이 되었죠.. 응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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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06   조회수 : 612    댓글 : 0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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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만남] 별명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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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님 에세이] 사랑법
2020.05.06   조회수 : 358    댓글 : 0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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