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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좋은생각

[햇살마루] 펭귄 아빠

엄마 펭귄은 알을 낳자마자 아빠에게 맡기고 먹이를 찾아 바다로 나간다알을 넘겨받은 아빠는 꽁꽁 얼어붙은 땅에서 쌩쌩 몰아치는 칼바람을 고스란히 맞으면서 알을 지킨다알을 두고 잠시도 자리를 뜰 수 없는 아빠는 아무것도 먹지 못한다잠도 자지 못한다.

 

무려 64아빠가 헌신한 덕분에 새끼는 알을 깨고 나온다아빠의 에너지가 바닥을 칠 때 엄마 펭귄이 돌아온다엄마는 빈손으로 귀환하지 않는다바다에서 얻은 먹이를 토해 아기 입에 넣어 준다이제 아빠 펭귄이 바다로 나갈 차례다차가운 바다에서 먹이를 구하느라칼바람 속에서 알을 지키느라 애쓴 부부의 역할이 바뀐 것이다.

 

부부가 힘을 합해 펭귄 한 마리를 키워 내듯 아들 부부도 임무를 교대하며 딸 하나를 키우고 있다. 1년 넘게 아기를 돌본 며느리가 복직을 하고아들이 집에 들어앉아 아기를 보기 시작한 것이다새로운 생활이 주는 힘 때문일까집 밖에서 시달리던 아기 아빠는 살림하고 아기를 돌보는 일을 좋아한다집 안에서 씨름하던 아기 엄마는 옷을 갖춰 입고 출근하는 시간을 즐거워한다.

 

아빠는 아기를 씻겨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청소와 빨래를 한다집을 정리하고아기 엄마와 아기가 먹을 저녁을 준비한다유모차를 끌고 동네를 한 시간 넘게 산책한다집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요리조리 빼는 아기를 달래며 아빠 밥 해야 해어서 들어가자.” 하는 동영상 속 신인류의 말은 신기하고 신선하기만 하다그리고 어여쁘기도 하다. 1988년에 엄마가 된 나는 꿈도 꾸어 보지 못한 신세계다.

 

주말에 시간 있어요?” 징검다리 휴일이 있는 주아들이 묻는다빡빡한 일정에 치여 사는 엄마의 상황을 익히 알면서 이렇게 대놓고 문을 두드릴 때는 이유가 있을지 모른다아들에게 희사할 시간을 내야지 마음먹는다어떻게든 일할 시간은 확보할 수 있겠지목요일부터 좋아.” 수요일 밤에 갈 수도 있어요.”

 

어어살짝 길다열일곱 달 된 손녀를 안을 수 있다는 기쁨 사이로 밀고 들어오는 고단한 현실거기에서 나는 자유롭지 못하다일정에 차질이 생기면 곤란하다컨디션이 무너지는 것도 무섭다하지만 금요일쯤 오면 좋겠단 말은 삼켜 버린다.

 

아기는 나비를 부르는 꽃인가손녀가 오면 우르르 식구들이 몰려든다목요일 한낮아들이 손녀를 데리고 출발할 때 남동생은 제 아이들을 데리고 출발했다다른 가족에게는 비밀 방문이었다.

 

아기의 출동을 알리지 마라!” 비밀리에 다녀가라고 살짝 일러둔 까닭이다그들은 특혜를 누린 걸 미안해하며아기를 볼 수 있음에 기뻐한다남동생은 무려 두 시간을 달려와서 몇 시간 놀다 집으로 돌아갔다그런데 일이 커졌다아기가 집에 왔다는 뉴스는 비밀이 될 수 없었던 것갑작스레 통풍이 와서 운전이 불가능해진 막냇동생이 작은누나한테 구조 요청을 보냈다.

 

토요일에 아기 보러 가자.” 아기가 보고 잡다 노래하는 막냇동생에게 청천벽력의 답신이 날아들었다. “나 일 있는데.” 막냇동생의 간절함을 모른 척하자니 맘이 불편했다결국 우리가 그 집으로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아기는 웃음을 길어 내는 오아시스다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삶의 사막을 건너느라 지친 낙타들이 깔깔하하호호.” 하고 아기를 둘러싸고 목을 적셨다우리가 떼 지어 환호할 때아기 엄마는 드라마를 보고 낮잠을 자며 뒹굴뒹굴고요한 오아시스에서 온전한 자유를 누렸다안에 있는 사람은 바깥에서 충전하고바깥에 있는 사람은 안에서 충전하는 것일까?

 

역할이 바뀐 뒤 펭귄 아빠와 펭귄 엄마의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어쨌거나 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사는 88년생 펭귄 아빠 덕분에 아기 펭귄을 다른 느낌으로 둘러쌀 수 있어서 즐겁다사위 없이 친정 나들이 온 딸을 맞는 기분이랄까편안함자유로움 같은 느낌이 꽤 특별하다그래서 펭귄 아빠의 외출을 기다리는 외가 식구들의 요청이 종종 이어진다. “아기 보고 싶다.” “우리가 아기 봐 줄게.” “언제든지 놀러 와.”

 

김미혜 님 | 아동 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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