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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좋은생각

[특집] 그 뜨거운 사랑

시린 바람이 코끝을 스친다. 쉼 없이 흔들리는 유칼립투스를 한참 보고 있노라니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이 눈물의 의미는 뭘까내가 서 있는 곳은 호주 칼바리. 지도에서도 찾기 힘든 작은 해안 마을이다. 이곳에서 홀로 두려움과 외로움을 견뎠을 아빠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엄마는 내가 돌이 되기도 전에 아빠와 이혼했다. 우리 집에서는 아빠에 대한 어떤 말도 금지되었다. 엄마의 마음속에는 배신감과 증오가 응어리져 있었다열두 살, 학교를 마치고 집을 향해 걷는데 누군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듣자마자 올 것이 왔구나.’ 싶어 전율을 느꼈다.

 

고개를 돌려 보니 깡마른 몸에 그리 크지 않은 키 그리고 까만 피부의 남자가 서 있었다오랫동안 상상한 아빠와의 재회. 우리는 근처 빵집에 마주 앉아 어색한 첫 대면을 했다. 아빠는 그동안 호주 광산에서 일했고 한 달 전 한국에 들어왔다고 했다.

 

엄마는 저녁 여섯 시가 넘어 퇴근했기에 하굣길에 아빠를 만나 한두 시간을 보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그렇게 두 달이 지났을 때, 더는 엄마를 속일 수 없어 털어놓았다. 엄마는 아빠는 우리 가족이 아니고, 절대 만나고 싶지 않다.”라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 말은 비수가 되어 내 가슴에 꽂혔다. 내가 아빠를 계속 만나면 엄마와 살 수 없다고도 했다.

 

지금껏 엄마 혼자서 얼마나 힘들게 나를 키웠는지 잘 알기에 그 말을 거역할 수 없었. 아빠는 모든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우리는 또다시 헤어졌다. 아빠와의 시간이 추억이 될 즈음, 아빠 친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아빠가 오랫동안 불치병으로 고통 받다 세상을 떠났다고. 무슨 정신으로 버스를 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아빠의 장례식장으로 한걸음에 달려갔다. 환하게 웃고 있는 아빠의 영정 사진을 보았다. 아빠 친구가 자세한 내막을 들려주었다.

 

아빠는 엄마를 사랑해서 결혼했고, 그토록 바라는 딸을 낳았다. 하나 본인의 병을 안 순간 앞으로 닥칠 불행을 직감했다고. 아빠는 엄마와 내가 병으로 고통받는 자신을 보면서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느냐며 지레 겁을 먹고 냉정하게 우리를 버리는 것처럼 상황을 만들어 도망쳤다.

 

아빠는 먼 땅으로 숨어들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고통을 견디며 오직 돈 모으는 데 전념했다. 남은 삶을 우리에게 바치기로 했다. 아빠는 생의 마지막이 다가오는 걸 직감하고 작별 인사를 하러 한국에 돌아와 나를 찾은 것이다

 

나는 오열하며 엄마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엄마는 정신을 잃고 구급차에 실려 갔다. 실에서 눈을 뜬 엄마는 소리 없이 울었다. 오랜 시간 쌓인 원망과 미움, 그럼에도 그리워한 마음과 함께하지 못한 미안함으로.

 

나는 대학생이 되어 아빠의 숨결이 남아 있을 듯한 이곳을 찾았다. 아빠와 함께한 두달은 너무 짧지만, 여전히 아빠의 온기를 기억한다. 아내와 자식을 향한 그 뜨거운 사랑을 고스란히 느껴 본다.

 

이혜정 님(가명) ㅣ 호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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