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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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좋은생각

[햇살마루] 사춘기잖아

어느 날 네이버 지식인에서 흥미로운 문의를 발견했다. 내용은 이러했다.

“우연히 사이코패스에 대한 글을 읽었는데 제 이야기인 것 같아서 너무 무서워요. 일단 저는 무슨 잘못을 해도 양심이 없어요. 다 주변 사람을 탓해요. 내가 잘못하는 건 남들이 먼저 잘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극도로 자기중심적이고요. 남들이 저 때문에 힘들어도 상관 안 해요. 고맙다거나 미안하다는 말도 하기 싫어요. 그 말을 해야 하는 것 때문에 오히려 화가 나요. 그리고 공감 능력 진짜 없어요. 누가 아프거나 힘든 일을 겪는다 해도 안타깝거나 관심이 가지도 않고요. 이런 제 자신이 무서워요. 어릴 적부터 제 성격이 이상한 건 알았지만 설마 했는데. 어떡하죠, 저?”
 

“나도 그럴 때 있는데.” “다 그런 거 아닌가.” “아마 님은 아닐 거예요.” 하는 식으로 어물어물 이어진 수많은 댓글은 정곡을 찌르는 누군가의 한마디로 깔끔하게 마무리되었다.

“사춘기잖아!”

당시 중학교 2학년 딸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이 답글은 굉장한 위로가 되었다.


또 이런 일도 생각난다. 딸은 뜬금없이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 학교에서 제일 행복한 아이는 나야. 난 자신 있어.”

불평투성이 중 2에게 기대하지 않은 고백을 들은 나는 내심 들떴다.

“그래? 뭐가 그렇게 행복한데?”

“우리 집! 십 년이나 살았는데 질리지 않아. 다른 동네로 이사 가지 않으면 좋겠어. 그리고 이번에 산 패딩 점퍼! 완전 성공했어. 디자인도 맘에 들고 왕 따스워. 난 식생활에도 크게 만족하고 있어. 의식주 다 좋으니까 내가 제일 행복한거지. 그러니까 내가 행복한 건 아빠의 월급 덕분이네.”

녀석은 뜨악해진 내 표정 따윈 살피지 않고 당당하게 사라졌다.


공들여 가르친 정신적 가치는 어디로 가고 황금만능주의가 웬 말인가. 한탄하는 나에게 현명한 친구는 중요한 점을 짚어 주었다.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옷 입고, 맛있는 거 먹어도 불행한 아이가 널린 세상이잖아. 본인은 그렇게 말해도, 행복한 데에는 실은 다른 이유가 있는 거야. 어리니까 그렇게 말한 거지.”

 

결국 나는 그날 내 딸이 무엇 때문에 행복을 느꼈는지 알아내는 데 실패했다. 단지 그들의 언어 소통이란 것이 이런 식으로 매우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쉬운 방식이란 것만 다시 확인했을 뿐이다. 어린 그들의 종잡을 수 없는 행복과 불행을 가르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우리는 쉽게 판정할 수 없다. 그들이 하는 말을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없다. 사춘기 아이들 앞에서 어른은 완전히 길을 잃은 기분이 된다. 

 

하지만 저 네이버 지식인에 글을 올린 주체는 분명 사춘기 아이다. 그는 “사춘기잖아!”라는 간결한 댓글에 ‘좋아요’를 남기고 사라졌다. 그들도 자기 마음을 고뇌하고 질문하고 있다는 증거다. 어른도 아이도 모두 고뇌하지만, 서로 이해에 도달하는 행복한 결말은 흔치 않다. 오히려 올챙이 시절의 기억은 모두 까먹고 ‘나 어릴 땐 안 그랬는데 쟤는 왜?’ 하는 괘씸한 마음에 사로잡히기 일쑤다. 그들의 말과 행동은 어른의 오해를 사기에 충분하다. 그들은 때론 이기적이고, 충동적이고, 무책임하고, 고마움을 모르며, 가장 좋은 소식조차 가장 기분 나쁜 방식으로 전하는 재주가 있다.

 

이런 어쩔 줄 모르는 상황에 처했을 때 쓸 수 있는 어른의 좋은 대사를 가르쳐 준 분은 바로 우리 할머니였다.

“그거 다 애 때 하는 일이여. 다 그럭허고 크는 거여.”

할머니의 이 말은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한 어린 내 마음에 알 수 없는 위로가 되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똑같이 위로를 준다. 할머니의 이 말에는 아이 자신도 알 수 없는 감정의 격동을 그 자체로 이해해 주라는 당부 그리고 지금 방황하더라도 언젠가 제 몫을 하는 사람으로 자랄 거라는 믿음이 담겨 있었다. 이제는 내가 할머니에게 받은 것을 내 아이에게 베풀 때다. 간절하나 무력한 어른의 마음과 묵묵한 기다림의 미학을 이처럼 짤막하게 요약해 준 할머니의 지혜가 오늘 불현듯 무척 소중하다.


심윤경 님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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