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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좋은생각

[좋은님 에세이] 연필로 쓴 일기

할아버지 서재에서 오래된 서류철을 발견했다. 어린 내가 건넨 천 원짜리 지폐부터 장난스럽게 쓴 낙서까지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가림이가 처음으로 할아버지 아껴 쓰시라고 용돈 줌.” “가림이가 할아버지에게 처음 쓴 편지.” “가림이가 자기는 가수 god(지오디) 오빠들과 결혼하겠다고 그림을 그려서 줌.” 할아버지는 자신이 세상에 없어도 그걸 간직해 달라고 당부했다. 

 

“이건 너만이 아니라 내 것이기도 해. 그러니 버리지 말아라.”

할아버지는 그 서류철을 얼마나 펼쳐 봤을까. 우리의 시간들을 몇 번이나 떠올렸을까. 아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기억은 연필로 쓴 일기 같아서 종종 꺼내 덧칠하지 않으면 옅어지는걸.

 

유치원 시절, 나는 맞벌이하는 부모님 대신 할아버지와 등원 준비를 했다. 덕분에 우리는 많은 것을 함께했다. 나는 집에서 유치원까지 혼자 걸어가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할아버지는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나를 끝까지 지켜보았다. 나는 걸어가다가도 몇 번이고 뒤돌아 할아버지가 나를 잘 보는지 확인했다. 가끔은 우스꽝스럽게 엉덩이춤을 추면서 걸어갔다. 그러면 할아버지는 크게 웃으며 빨리 가라고 손을 내저었다.

 

대학생이 된 나는 더 이상 뒤돌아보지도, 할아버지를 웃기려 춤추지도 않는다. 할아버지는 앞만 보고 가는 내가 야속할까? 아니면 다 컸다고 기특해할까? 할아버지가 내 세상의 전부인 때가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내 세상엔 점점 새로운 게 생겨났고, 나는 지나간 것을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흐릿해진 연필 자국을 외면할 때도 할아버지는 우리의 일기를 덧칠했다. 오래된 서류철 사이로, 우리가 살던 아파트 창문 위로.

 

내가 할 수 있는 건 가끔 그 일기를 들추어 보는 것, 희미해진 글자들을 조금씩 덧쓰는 것. 나의 모든 것을 사랑한 할아버지 마음도 눌러 담아.

 

전가림 님 | 경기도 성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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