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1월호를 소개합니다
- [햇살마루] 꿈을 공작하는 사람
내 중학생 시절 국어 선생님은 목소리가 크고 활기찼다. 씩씩하게 걷고 우렁찬 소리로 웃었다. 나는 웃는 동작에 그렇게나 많은 근육이 쓰이는 줄 그때 처음 알았다. 어깨를 활짝 펴고 고개를 젖힌 뒤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웃는 그녀의 모습을 몰래 따라 해 본 적도 있다. 움츠린 근육이 스프링처럼 튀어 올라펴지는 기분이었다. 당시 고입 시험 준비로 적막하게 굳은 교실에서는 선생님만이 소리와 색깔을 지녔다. 책상에 문제집을 벽처럼 쌓아 놓고 버티던 아이들이 조심스레 소리를 섞고 색을 훔쳐보았다. 선생님은 한결같이 소란스러웠다. 큰 소리로 누군가를 호명하고 어깨를 팡팡 두드려 댔다. 선생님 걸음걸이나 웃음소리를 흉내내는 아이들이 종종 눈에 띄었다. 아이들이 처음으로 웅성거린 건 여름 방학 숙제 목록을 받아 든 뒤였다. 모의고사 오답 노트, 수학 기출 문제 프린트처럼 익숙한 단어들 사이에 국어 숙제만이 생소한 탓이었다. “단편 소설 창작하기(원고지 60매).” 소설이라고? 나는 질린 얼굴로 아이들과 함께 수군거렸다. “세상에, 소설 쓰기가 숙제라니 말도 안 돼. 그걸로 대체 뭘 하라고?” “국어 성적 올리는 데 소설이 무슨 소용이야?” 보충 수업이 끝난 즉시 나는 집으로 내달렸다. 흰 종이를 꺼내 놓고 땀을 뻘뻘 흘리며 소설을 썼다. 숙제니까 어쩔 수 없지. 변명과 함께 눌러쓴 글자들을 몇 번이고 고쳤다. 표지를 만들어 붙이고, 원고가 낱장으로 풀어질까 봐 구멍을 뚫어 노끈으로 묶었다. 당시만 해도 나는 알지 못했다, 내가 평생 글을 쓰게 될 줄은. 세상에, 소설 이까짓 게 다 뭐람. 그렇게 투덜거렸다. 첫 소설책이 나오자마자 나는 선생님을 만나러 갔다. “그때 선생님이 내 준 숙제 때문이에요.” 나는 따지듯 말한 뒤 선생님이 사 준 맥주를 마시고 치킨 날개를 뜯어 먹었다. 선생님은 여전히 우렁차게 웃다가 내게 물었다. “그럼 이젠 뭘 할 거야?” “또 책을 내야죠.” “그러고 나서는?” “또, 또 책을 내야죠. 선생님은요?” “내 장래 희망은 말이야.” 나는 흠칫 놀라 맥주잔을 내려놓았다. 장래 희망이라고? 아이들이 삐뚤빼뚤한 글씨로 써 넣는 그거? 진로 조사 할 때나 물어보는 그 장래 희망? “나는 나중에 책방 주인이 될 거야. 책만 파는 곳 말고 사람들끼리 독서 모임도 갖고 얘기도 나눌 수 있는 책방. 작가의 방 같은 것도 있음 좋겠다. 네가 와서 글도 쓰고 나랑 수다도 떠는 거야.” “선생님은 이미 선생님이잖아요?” “지금은 그렇지. 그러니까 나중에 말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의구심이 가득했다. 그렇게 선생님과 헤어졌다. 선생님이 사 준 케이크를 무릎에 올려놓은 채,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선생님을생각했다. 선생님, 선생님 장래 희망은 선생님이었을 거잖아요. 그게 이루어졌으면 끝 아닌가요? 다른 꿈이 왜 또 필요해요? 이후 선생님과 만나지 못하고 여러 해가 흘렀다. 다음 책, 또 다음 책을 출간했음에도 이상하게 내 안의 계절은 하나뿐이었다. 중학생 시절 땀을 뻘뻘 흘리며 문장을 짜낸 여름밤이 매일 반복되는 기분이었다. 그 시절과 다른 것이 있다면 나는 지쳐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원고를 책상에 벽처럼 쌓아 올린 채 나는 불투명한 젤리처럼 굳어 갔다. 다시금 소리와 색이 사라진 세계에 혼자 남겨진 기분이었다. 나는 작가가 되고 싶었고, 작가가 되었지. 그래서 그 다음엔? 초조하고 스산한 마음이 나를 짓누른 때였다. “오랫동안 생각해 오던 일을 강화읍에 작은 책방 열기부터 시작하려고 해.” 네게 언젠가 말했던 것처럼, 이라고 선생님은 메일을 이어 갔다. 십여 년 만의 연락이었다. 나는 선생님이 부천의 작은 맥줏집에서 늘어놓은 말을 떠올렸다. 선생님의 장래 희망에 대해서도. ‘선생님이 되어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이 되어 책방 주인을 꿈꾸었고, 책방 주인이 되어 독서 모임을 꿈꾸었고, 하는 식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선생님의 이야기를 나는 오래오래 떠올렸다. 은퇴했다고 가만히 있을 분이 아니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선생님은 소란하고 활기찬 사람이니까. 고이거나 굳어 버릴 틈 없이 바쁘게 내일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니까. 책방 이름에 붙은 ‘꿈 공작소’라는 덧말을 소리 내어 발음해 보았다. 선생님다웠다. 나는 조만간 선생님의 작은 책방에 들르겠다는 답을 남겼다. 오늘을 씩씩하게 걸어 내일로 가겠다고, 꿈을 공작하는 그곳으로 찾아가겠다고. 책방 주인이 되었지만 내게는 여전히 선생님인 당신에게 가겠노라고. 안보윤 님 | 소설가 원고 응모 정기 구독
- [동행의 기쁨] 자연스러운 일
“저희는 과일을 크기와 모양으로 선별하지 않습니다. 소비자를 공동 생산자라 생각하며 농부와의 상생을 추구합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과일을사려면 이 질문에 답을 해야 하는 곳이 있다. 과일 장수 공석진 님(44세)이 운영하는 온라인 과일 가게 ‘공씨 아저씨네’다. 과일 없인 하루도 못 산다는 그는 십 년 전, 귤을 팔아 볼 요량으로 과일 유통일을 시작했다. 홈페이지를 만들고, 거래할 농민을 찾았다. 홈페이지로 주문을받아 농가에 전달하면 그곳에서 직접 소비자에게 보내 주는 식이었다. 일을 시작하고 보니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었다. 과일은 크기와 생김새에 따라 가치가정해졌다. 이 때문에 일부 농가에서는 과일에 인위적인 작업을 하기도 했다. 또한 명절 날짜, 시장 가격 등을 따져 과일이 채 익기도 전에 땄다. 그는 맛과 향에 중점을 두고 과일을 유통한다. 또, 잘 익어 가장 맛있을 때 수확해서 소진할 수 있는 만큼만 판다. 그렇게 파는 과일은 시중에서 볼 수 있는 것 보다 크기가 작은 편이다. 몇 년 전 자두를 팔 때의 일이다. 과일은 날씨에 따라 크기가 달라지는데, 그해에는 가문 탓에 자두가 탁구공보다 작았다. 한 손님에게서 항의 전화가 왔다. “어디서 이따위 콩알만 한 자두를 팝니까?” 크고 예쁜 과일에 익숙한 탓이었다. “그분의 반응도 이해해요. 기존 시장에서는 이런 과일을 헐값에 팔아요. 맛있음에도 ‘비상품과’로 취급하는 거예요. 저는 그다음부터 자두를 팔 때 ‘콩알만 한 자두’라고 이름을 붙였어요. 소비자가 단점이라고 생각할 여지가 있는 부분을 숨기지 않고 내세운 거죠. 이후 크기에 대한 항의는 없었어요.” 지난봄은 유독 기온이 낮았다. 냉해 탓에 사과 품종 ‘아리수’는 껍질이 거칠고 누런 빛을 띠었다. 이른바 ‘동록 현상’이 일어난 것. 하지만 맛에는 아무 지장이 없다. 그는 이 사실을 소비자에게 알리고, 제품을 보통 사과와 같은 값에 판매했다. 사과는 며칠 사이에 모두 팔렸다. 소비자는 오히려 울퉁불퉁하고, 노란색이 많은 사과를 아름답다고 느꼈다. 과일이 생김새가 아닌 맛과 향으로 평가되어야 한다는 그의 생각이 통한 것이다. 그는 말했다. “작거나 못생겨도 맛있어요. 그걸 직접겪어 보지 않으면 몰라요. 지난 십 년은 소비자에게 그것을 경험하게 해 준 시간이에요. ‘어? 맛있네?’ 하고 먹다 보면 고정 관념이 깨질 거라고 생각했어요.” 처음에 그는 모든 소비자에게 맞추려고 노력했다. 소비자는 편리하고자 다양한 요구를 했다. 그는 어느 순간 깨달았다, 모든 이의 요구를 들어주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내가 할 수 있는 일만 하자. 못하는 건 못한다고 이야기하자.’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이후 그는 홈페이지와 에스엔에스를 통해 자신이 하는 일과 상품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또 손님들에게 미리 안내했다. “날씨에 따라 맛이 다를 수 있습니다. 전년보다 맛있을 수도, 맛이 덜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로써 과일에 대해 몰랐던 사실을 알았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사과 과육의 투명한 부분을 ‘꿀’이라 부르며, 이게 많으면 더 달다고 생각한다. 이는 ‘소르비톨’이라는 성분으로, 당분이 뭉쳐서 생긴 생리 장해다. 정상적인 생육 과정을 거치면 당분이 전체 과육으로 퍼져 이런 부분이 없다. 다만 이런 부분이 많으면 저장성이 떨어지기에 빨리 유통해야한다. 그는 이것이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아니며,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설명한다. 또 복숭아를 먹다 보면 씨앗이 갈라진 ‘핵할 현상’을 볼 수 있다. 과일이 자라는 동안 날씨가 가물다가 갑자기 비가 오면 나타난다. 과육에 지장이 없다면 이 역시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이기를 권한다. 그는 이 일을 하면서 자연에 민감해졌다. 지난봄에는 이상 기후로 꽃이 제대로 피지 못했다. 그러자 벌이 활동하지 못해 꿀 생산량이 줄고, 꽃도 수정하지 못해 열매를 맺지 못했다. 게다가 긴 장마로 식물들이 광합성을 잘 할 수 없었다. 햇빛을 많이 쬐어야 하는사과는 그 탓에 수확량이 반토막 났다. 그 영향은 고스란히 소비자에게 돌아갔다. 그는 자신이 환경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고민했다. 온라인으로 과일을 유통하다보니 자연히 포장재를 많이 썼다. 과일이 유통 중 부딪혀 멍들지 않도록 이중, 삼중으로 싸는 까닭이다. 그는 상자에 가득찬 포장재를 보며 하나씩 빼 보자고 마음먹었다. 우선 사과에 씌운 개별 캡을 뺐다. 또 사과, 복숭아 등 둥근 과일을 상자에 꼭 맞게 담는 용도의 ‘난좌’는 스티로폼 대신 종이로 만든 것을 구해 쓴다. 몇 년 전에는 사과즙을 팔았는데, 손님들에게 빈 봉지를 모아 보내 달라고 했다. 깨끗이 씻어야 하고, 수십 개를 모으는 일이 번거로웠을 텐데도 적지 않은 이가 보내 주었다. 그렇게 모은 봉지로 컵 받침을 만들어 일부 손님들과 나눴다. 과일 가게를 운영한 지 십 년, 그동안 변화가 있었느냐는 질문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이 일을 했을 땐 ‘과연 고정 관념이 바뀔까?’라는 질문에 선뜻 대답할 자신이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어느 정도 변화를 체감해요. 지금 소비자는 과일의 크기, 생김새에 훨씬 관대해요. ‘맞아, 상관없지.’라고 생각하는 분이 많아요. 십 년, 또 이십 년 후에는 과일을 맛과 향으로 평가하자는 제 말을 ‘뭘 당연한 얘길 하고 그래.’라며 흘려들으면 좋겠어요.” 그는 자신의 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상식적인 범주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해요.” 그게 어떤 의미인지 묻자, 그는 드라마 〈모래시계〉 속 한 장면을 이야기했다. “극 중 사회부 기자인 ‘신영진’이 기사를 썼는데, 데스크에서 반려해요. 그녀가 따지자 부장이 말하죠. ‘신문에 기사 한 줄 나간다고 세상이 변하지 않아.’ 그녀가 이렇게 답해요. ‘누가 세상을 바꾸자고 했나요? 기사 내자고 했지. 그게 기자가 할 일 아닌가요?’ 그 말이 저에게 큰 감동으로 다가왔어요. 과일 장수인 내가 할 일은 뭔가, 스스로에게 물었어요. 과일 장수가 세상을 나아지게 하는 방법은 과일을 상식적으로 파는 거예요.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해내면 변화를 불러올 거라고 믿어요.” 글 _ 정정화 기자, 사진 _ 케이이미지 원고 응모 정기 구독
- [특집] 앞집 그녀
십 년간 중국 베이징에서 살다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하던 일을 접고 귀국했다. 많은 중국인을 만났지만 특히 잊을 수 없는 사람이있다. 앞집 샤오한 엄마다. 우리가 샤오한네 앞집으로 이사 간 때는 한국과 중국의 관계가 살얼음판 같은 시기였다. 교민들 사이에 흉흉한 소문이 퍼졌다. 그래서인지 앞집 여자는 나와 마주쳐도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학교에 다녀오는 초등학생, 중학생 딸들도 나를 외면하고 현관문을 ‘꽝’ 닫아 나를 무안하게 했다. 한국 학생들을 대상으로 입시 과외를 한 나는 아이들에게 드나들 적에 현관문을 살살 닫고 엘리베이터에서도 조용히 하라고 신신당부했다. 우리 가족은 겨우내 숨죽여 지냈다. 봄바람이 불어올 무렵이었다. 그날도 외출하려고 집을 나서는데 때마침 나오는 앞집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내가 반갑게 인사하자 그녀도 마지못해 미소로 답했다.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서 나는 우리 학생들이 오가며 시끄럽게 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그녀는 괜찮다면서 내게 뜻밖의 말을 건넸다. “대단해요. 가르치는 학생이 많은 걸 보니 능력이 있나 봐요. 부럽네요.” 움츠린 마음이 풀리는 듯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무심코 물었다. “남편은 무슨 일을 하세요?” “그이는 작년에 세상을 떠났어요.” “정말요?” 나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녀는 눈시울을 붉혔다. 그녀의 남편은 암 수술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으나 경과가 좋지 않아 다시 입원했고 결국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미안했다. 앞집에서 큰일을 치른 것도 모르고 지냈다니. ‘아이들과 엄마가 그 많은 밤을 눈물로 보냈을 텐데 내가 무심했구나.’ 사정도 모르고 앞집을 오해한 내 모습이 떠올라 부끄러웠다. 그동안 앞집 가족의 행동이 냉랭했던 이유는 힘들고 숨 막히는 일을 겪느라 지쳐서였다. 그녀와 헤어지면서 말했다. “주말에 같이 차 마셔요.” 그녀는 중국 전통 과자인 월병을 들고 우리 집에 왔다. 그렇게 우리는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고, 서로 택배를 받아 주며, 기쁜 일과 슬픈 일을 나누는 이웃이 되었다. 게다가 그녀는 내게 더없이 좋은 중국어 선생님이었다. 하루는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제 남편이 떠난 지 일 년이 지났으니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녀는 아이가 어려서 회사 출근을 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한국 학생에게 중국어 과외를 하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내가 한국어를 알려 주겠다고 했다. 우리는 일주일에 두 번씩 만나 서로의 언어를 배웠다. 그녀는 내가 소개해 준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정식 강사 과정을 밟아 자격증까지 땄다. 코로나19로 모든 학원이 문을 닫았다. 그녀는 수입이 없는 나를 걱정하며 시장에 갈 적마다 우리 몫까지 장을 봐 주었다. 비쩍 마른 몸으로 두 집 찬거리를 자전거에 싣고 와서는 이마에 땀이 송송 맺힌 채로 문을 두드렸다. “얼마나 힘들어요.” 나를 걱정하며 나직하게 물어 오던 그녀의 정겨운 얼굴이 떠오른다. 문명자 님 | 경기도 고양시 원고 응모 정기 구독
- [오늘의 만남] 아버지의 질문
어릴 적 내가 살던 곳 근처에 야트막한 산이 있었다. 일요일 아침마다 나는어떻게든 늦잠을 자려 했고, 아버지는 그런 내가 함께 뒷산으로 나설 때까지 기다렸다. 예외 없이 나와 동생은 뻑뻑한 눈을 비비며 아버지를 따라 등산로로 향했다. 그날도 산을 오르는 중이었다. 한겨울이라 등산로에는 눈이 얕게 쌓였고 사람들의 발자국을 따라 흙이 듬성듬성 드러났다. 한참 걷다 보니 등산로 옆으로 울타리가 쳐져 있었다. 그 안쪽의 작은 나무 팻말엔 이렇게 적혔다. “이 곳은 사유지임.” 아버지는 걸음을 멈추더니 팻말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러곤 앞에 놓인 주먹만 한 돌멩이 하나를 집어 들고 나에게 물었다. “여기는 사유지구나. 너는 이게 무슨 뜻인 것 같으냐.” 나는 그 정도는 안다는 듯 대답했다. “그야 주인이 있는 땅이란 뜻이겠지요.”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누군가가 이 땅의 주인이란 의미지. 하지만 누군지는 몰라도 아마 여기 놓인 돌멩이 하나 만져 보지 못한 채 땅 주인으로서의 삶을 마감하지 않을까?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 주인 자리를 넘겨주겠지.” 아버지는 손에 든 돌멩이로 시선을 옮기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말이다. 여기 놓인 돌멩이 하나, 나무 한 그루조차 만져 보지 못한 그가 이 땅을 진정으로 가졌다고 할 수 있을까? 이곳을 소유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그는 이땅을 잠깐 스쳐 지나가는 것 뿐 아닐까?” 그날 아버지는 나에게 ‘삶의 본질은 소유가 아닌 경험’이란 걸 깨우쳐 주고자 했으리라. 돌이켜 보면 아버지는 늘 그런 식이었다. 질문을 던지고 내가 스스로 생각할 여지를 남긴 채 기다렸다. 이제 내가 그 무렵의 아버지 나이가 되었다. 나는 종종 딸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나도 그런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 나도 묵묵히 기다려 줄 수 있을까. 비로소 알 것 같다. 아버지의 그 숱한 기다림에는 내가 아버지가 되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스스로 깨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겼음을. 신승건 님 | 외과 의사, 작가 원고 응모 정기 구독
- [좋은님 에세이] 조금 느려도
대화가 안 통하거나 표현이 서툴고 행동이 굼뜬 사람을 만난다면 어떻게 할까? 과거의 나라면 그를 이상한 사람 혹은 함께하기 힘든 사람이라고 섣불리단정 지었을 테다. 나는 이 질문에 해당하는 청년들을 만나는 교사다. ‘느린 학습자’ 혹은 ‘경계선 지능을 가졌다’고 불리는 청년을 교육하고 그들의 자립을 위해서 활동한다. 조금 느린 우리 청년들은 동문서답을 잘하고, 스스로 선택하는 것을 두려워하며, 자신의 의견을 논리적으로 말하기 어려워 감정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또한 다른 사람보다 훨씬 많이 반복해야 일을 익힐 수 있다. 느린 학습자는 전체 인구의 15퍼센트일 정도로 꽤 많이, 우리 곁에 존재한다. 하지만 대부분 이들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다. 결국 이들은 더 소외된다. 이들과 함께하면서 깨달은 점이 있다. 조금 다르고 느리다는 이유로 차별받고 낙인찍힌 경험이 그들을 움츠러들게 하고, 사회에 나가지 못하게 한다는 걸.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이야말로 가장 큰 장벽이다. 실패를 겪고 ‘청년 행복 학교 별’에 찾아온 청년들은 이곳에서 또래를 사귄다. 관계를 만들어 나가며 소통, 협동하는 법과 일을 배운다. 처음엔 아무 말도 못했던 청년도 나중에는 자기표현을 확실하게 하고 일에 의욕을 보였다. 변화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봐 주는 친구들의 환대와 이곳이 안전한 공간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됐을 테다. 이들에게는 학습보다 인정과 이해가 더 필요했다. 어쩌면 우리 모두 느린 학습자가 아닐까. 누구나 잘하는 일과 못하는 일이있으니까. 조금 느려도 괜찮다. 이들을 너그럽고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기다려 주자. 그러면 사회 구성원으로서 멋지게 자신의 일을 해내는 모습을 볼 수 있을 테다. 안은비 님 | 청년 행복 학교 별 교사 원고 응모 정기 구독
- [새벽햇살] 튼튼한 울타리
나는 식탁에서 고등어구이조차 구경하기 어려울 만큼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늘 주눅 들어 있었고, 친구 한 명 없이 외롭게 지냈다. 아버지는 술만 마셨고, 어머니는 그 모습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매일 이런저런 이유로 다투는 부모님을 보며 가정에 정을 붙일 수 없었다. 나는 부모님과 점점 멀어지면서 비뚤어졌다. 학교 앞 문구점에서 사탕과 껌 등을 훔쳐 먹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 했던가. 나는 점점 대범해지고 씀씀이도 커졌다. 불량한 친구들과 어울리며 나의 방황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 번 맛본 돈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일해서 받은 월급만으로는 내 씀씀이를 감당하지 못했다. 그런 내 모습에 주위 사람들은 등을 돌렸다. 가족들조차 떠나 어디에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죄를 저지르고 도피 생활을 하는 중, 동갑인 여자 친구를 만났다. 우리는 연인이 되었고 동거를 시작했다. 통장 잔고가 바닥을 보여 당장 일해야 하는 상황이 왔다. 그렇게 나는 막일 중에서도 힘들기로 손꼽히는 대리석 시공을 했다. 첫날, 너무 힘든 나머지 관두고 싶은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때까지 일한 시간이 아까워 가까스로 버텼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니 앞치마를 두른 그녀가 쌀밥과 찌개, 불고기와 고등어구이를 차려 놓았다. 그 모습에 눈물이 났다. 그때까지 누군가가 정성스럽게 차린 밥상을 받아 본 기억이 없었다. 힘든 하루를 보상받는 듯하고, 피로가 녹아내렸다. 살면서 한번도 느껴 보지 못한 감정에 먹먹했다. 그 뒤로 나는 달라지려 노력했다. 일 년여간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며 그녀와 행복하게 지냈다. 하나 마음 한편은 늘 불안했다. 내가 지은 죄 탓이었다. 자수를 여러 번 고민했으나 지금의 행복이 깨질까 두려워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결국 나는 구속되고 말았다. 접견 온 그녀의 얼굴을 차마 볼 수 없었다. 나는 고개 숙인 채 눈물만 떨궜다.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얼굴 좀 들어 봐. 과거에 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같이 지내는 동안 네가 누구보다 노력했다는 걸, 다른 이들은 몰라도 나는 잘 알아. 그게 아마 너의 진짜 모습일 거야. 네가 그 모습을 잃지 않으면 앞으로도 나는 너와 함께할 거야. 그러니 너도 반성하고 돌아와.” 과거가 탄로 나면 행복이 깨질까 봐 불안해하며 지낸 나에게 내 과거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그녀. 그녀는 지금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를 기다린다. 예전과 달리 이제는 내게 돌아갈 곳이 있다. 그녀와 만들어 갈 미래를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진다. 이곳에서 나가면 제일 먼저 그녀를 말없이 안아 주고 싶다. 아마 그녀도 포옹에 담긴 많은 의미를 알아차리리라. 그리고 부모님을 찾으려 한다. 처음부터 모든 걸 해결할 수는 없겠지만, 엉켜 버린 실타래를 천천히 풀어 갈 테다.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튼튼한,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칠 것이다. 새벽 햇살 책 후원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