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장바구니0

이달의 좋은생각

[오늘의 만남] 씨앗 마실

12월이 되면 마을 사람 몇몇이 모여 홍동면을 돌아다니며 할머니들을 만난다. 우리는 이 일을 ‘씨앗 마실’이라고 부른다. 겨울이라 농사일은 없지만, 할머니들의 손은 여전히 분주하다. 일 년 내내 농사지은 콩이나 깨, 시금치 씨앗 등을 체로 치고, 키질로 쭉정이를 날려 튼실한 종자를 고른다. 

 

그러기를 수십 년, 같은 일의 반복이지만 할머니들에게는 지나온 역사를 숨 고르기 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씨앗 마실 나간 첫해, 처음 만난 할머니의 이야기를 잊을 수 없다. 일흔셋이던 할머니는 스물다섯 살에 시집왔다고 했다. 그때 가지고 온 ‘이팥’이란 토종팥을 48년째 씨로 심고 있었다. 그 긴 세월을 이어 온 까닭이 궁금해 물으니, “지금 것은 맛이 없어.”라고 답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어릴 적 친정 엄마가 해 준 팥죽이며 팥빵 맛을 잊지 못하고 지금도 키우는 것이다. 시집올 때 씨앗을 가져온 이유를 물었다. 

 

“지금이야 텔레비전이며 냉장고를 혼수로 해 가지만, 옛날엔 딸이 시집간다고 하면 그해 농사지은 것 중에 제일 좋은 씨앗들만 골라서, 옷 한 벌과 함께 옷장 속에 넣어 주셨지. 그게 다야.”

 

또 다른 할머니는 열여덟 살에 위안부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등 떠밀려 시집 왔다. 가마를 타고 이틀이 걸려 왔다고 하니, 꽤 부잣집에서 시집온 것이 분명했다. 그때 가져온 씨앗이 ‘청태’라 부르는 푸른 메주콩이다. 동네에서 청태는 처음 봐 얼마나 신기했는지 모른다. 할머니에게도 아직까지 이 씨앗으로 농사짓는 이유를 물었다. 

 

“우리 동네에는 시집갈 때 친정에서 가져온 씨앗을 밑지면(씨앗 농사를 잘못 지어 다 없어지면) 친정과 연이 끊긴다는 말이 전해지거든.”

 

나는 그제야 비로소 여든 넘은 할머니 중 유독 토종 씨앗으로 농사짓는 분이 많은 이유를 알았다. 열여덟, 스물에 시집온 할머니들의 씨앗에는 그분들의 역사와 애환, 희망이 고스란히 담겼다. 그것들이 지금의 우리를 지탱해 주는지도 모른다. 그 귀한 씨앗을 마음껏 퍼서 우리 손에 쥐여 주는 할머니들 얼굴에는 모든 걸 품은 편안함이 깃들어 가슴이 따뜻해진다. 그 씨앗이 우리 안에 자라길 희망한다.

 

오도 님 | 홍성 씨앗 도서관장

 

     


고객문의

  • 정기구독02 - 337 - 0332
  • 다량문의02 - 330 - 0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