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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좋은생각

[특집] 길을 잃었다

길을 잃었다고향을 떠나 5년간 산 경기도 오산이 지겹고 답답해 새 출발 하는 마음으로 수원에 자취방을 구하러 가는 참이었다초행길이었으나 버스를 한 번만 갈아타면 되는한 시간 반 남짓 거리라 자만했나 보다수원 어딘가에서 내려 환승할 버스를 기다렸다버스 번호도 두세 번 확인했고나의 목적지도 버스 머리에 크게 적혀 있으니 더는 의심 않고 탔다안내 방송에 귀 기울인 채 창밖 풍경에 시선을 두었다한참을 달려도 내가 내려야 할 정류장 이름이 나오지 않았다버스는 점점 변두리로 향했다타는 사람도 없고 그나마 있던 승객들도 정류장마다 내렸다어느새 기사님과 나만 남았다버스는 인적 없는 동네를 그저 달렸다그제야 깨달았다. ‘이 길에 나의 목적지는 없구나…….’

 

수치심에 몸이 떨렸다서른 살이나 먹고 버스를 잘못 탄 걸 기사님이 눈치채면 어쩌나속으로 비웃진 않을까태연히 벨을 누르고 다음 정류장에서 내릴까기왕지사 끝까지 가볼까그럼 말로만 듣던 버스 종점이 나올까생각들이 끝도 모르고 엉겨 붙는 사이 버스는 영 어울리지 않는 곳에 섰다키 작은 아파트 몇 동이 모여 있는 한적한 동네 일각이다노선의 반환점 같은 곳인가 보다맞은편으로 건너가 탔어야 했다시동을 끄고 일어난 기사님이 꿈쩍도 하지 않는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어데 갑니까?”

…… 법원 사거리요.”

타고 있으이소.”

 

기사님은 길 건너 작은 슈퍼마켓으로 들어갔고 난 덩그러니 남겨졌다버스 안 가득했던 사람들이 떠올랐다모두 각자의 목적지를 막힘없이 찾아갔다스마트폰에 집중하다가도 타야 할 버스가 도착하면 제때 올라탔다머리를 휘청거리며 단잠에 빠지거나 일행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내려야 할 곳을 지나치는 이는 없는 듯 보였다그 많은 사람 중에 오직 나만이 서툴렀다모든 것에 세련되고 태연할 줄 알았던 서른 살의 나는 낯선 동네 시동 꺼진 버스 안에 홀로 앉아 울음을 참았다.

 

지방 4년제 대학교를 졸업하고 드라마 작가가 되겠다고 경기도 오산으로 올라와 버틴 시간이 5번듯하고 안정된 직장에 대한 욕망도 없었다교육원에 등록한 뒤 공부하는 동안 쓸 최소한의 생활비를 벌기 위해 전자 부품 공장에서 2교대로 일했다어느 해에는 야간에 12시간씩 일하며 잠도 자지 않고 두 시간 반 거리의 교육원에 다녔다힘든 줄 몰랐다. 30대는 아직 멀었고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곧게 뻗은 길을 그저 열심히 걸어가면 될 줄 알았다터널이면 이때쯤 작은 빛이 보일 텐데막장이었나점점 더 깊은 어둠을 느꼈다내가 지쳤다는 것을 표현하는 방법은 많았다여기저기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작법은 똑같은데 영화 시나리오나 써 볼까 하다가작사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실용음악 학원을 다닌 적도 있다이름난 코미디 쇼의 구성 작가 면접을 보러 간 날은 짙고 검은 추위에 그저 섧었다부모님 품으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도 서너 계절간 내 곁에 머물렀다그렇게 5년을 흘러 도착한 곳은 넓이도 깊이도 짐작할 수 없는 먼 바다와도 같은 곳이었다사위(四圍)가 뚫려 어느 쪽으로든 자유롭게 갈 수 있는 듯 보이나 난 그 어디로도 출발할 수 없었다적도의 바다였나 보다파도가 없었다내 안에서 더는 어떤 동요도 일어나지 않았다고요하고 쓸쓸했다나약하고 무기력했다있는 힘껏 손을 뻗어도 그 손을 잡아 줄 누군가가 없을 것 같았다그래서일까고작 버스 한 번 잘못 탔을 뿐인 그 사소한 일에 서러운 울음을 삼킨 이유가내 삶에서 길을 잃은 것을그날의 나는 알았나 보다.

 

기사님의 쉬는 시간은 담배 한 개비로 끝났다버스로 돌아온 기사님은 시동을 걸고 다시 떠날 준비를 했다덤덤한 척하지만 둘 곳 잃고 떠다니던 내 시선이 룸 미러 속 기사님 얼굴에 가닿았다다행히 기사님은 내게 관심 없는 듯했다눈물은 닦아 없겠지만 부은 눈이 부끄러울 뻔했다요금을 다시 내야 하는지 여쭤볼까 고민하는데 기사님이 대수롭지 않은 듯 한마디 건넸다.

 

뻐스 잘못 타가 삥삥 도는 사람 숱합니데이.”

 

웃음조차 없이 무심한 목소리였다혼잣말인가도 싶은 것이 위로하려 꾸민 말은 아닌 듯했다외려 위로가 되었다겨우 삼킨 울음을 토해 낼 뻔했다그 시절의 내가 절실히 듣고 싶은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민정 님 경기도 오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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