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카테고리

[특집] 길을 잃었다
2018.11.09   조회수 : 1,371    댓글 : 7개

길을 잃었다고향을 떠나 5년간 산 경기도 오산이 지겹고 답답해 새 출발 하는 마음으로 수원에 자취방을 구하러 가는 참이었다초행길이었으나 버스를 한 번만 갈아타면 되는한 시간 반 남짓 거리라 자만했나 보다수원 어딘가에서 내려 환승할 버스를 기다렸다버스 번호도 두세 번 확인했고나의 목적지도 버스 머리에 크게 적혀 있으니 더는 의심 않고 탔다안내 방송에 귀 기울인 채 창밖 풍경에 시선을 두었다한참을 달려도 내가 내려야 할 정류장 이름이 나오지 않았다버스는 점점 변두리로 향했다타는 사람도 없고 그나마 있던 승객들도 정류장마다 내렸다어느새 기사님과 나만 남았다버스는 인적 없는 동네를 그저 달렸다그제야 깨달았다. ‘이 길에 나의 목적지는 없구나…….’

 

수치심에 몸이 떨렸다서른 살이나 먹고 버스를 잘못 탄 걸 기사님이 눈치채면 어쩌나속으로 비웃진 않을까태연히 벨을 누르고 다음 정류장에서 내릴까기왕지사 끝까지 가볼까그럼 말로만 듣던 버스 종점이 나올까생각들이 끝도 모르고 엉겨 붙는 사이 버스는 영 어울리지 않는 곳에 섰다키 작은 아파트 몇 동이 모여 있는 한적한 동네 일각이다노선의 반환점 같은 곳인가 보다맞은편으로 건너가 탔어야 했다시동을 끄고 일어난 기사님이 꿈쩍도 하지 않는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어데 갑니까?”

…… 법원 사거리요.”

타고 있으이소.”

 

기사님은 길 건너 작은 슈퍼마켓으로 들어갔고 난 덩그러니 남겨졌다버스 안 가득했던 사람들이 떠올랐다모두 각자의 목적지를 막힘없이 찾아갔다스마트폰에 집중하다가도 타야 할 버스가 도착하면 제때 올라탔다머리를 휘청거리며 단잠에 빠지거나 일행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내려야 할 곳을 지나치는 이는 없는 듯 보였다그 많은 사람 중에 오직 나만이 서툴렀다모든 것에 세련되고 태연할 줄 알았던 서른 살의 나는 낯선 동네 시동 꺼진 버스 안에 홀로 앉아 울음을 참았다.

 

지방 4년제 대학교를 졸업하고 드라마 작가가 되겠다고 경기도 오산으로 올라와 버틴 시간이 5번듯하고 안정된 직장에 대한 욕망도 없었다교육원에 등록한 뒤 공부하는 동안 쓸 최소한의 생활비를 벌기 위해 전자 부품 공장에서 2교대로 일했다어느 해에는 야간에 12시간씩 일하며 잠도 자지 않고 두 시간 반 거리의 교육원에 다녔다힘든 줄 몰랐다. 30대는 아직 멀었고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곧게 뻗은 길을 그저 열심히 걸어가면 될 줄 알았다터널이면 이때쯤 작은 빛이 보일 텐데막장이었나점점 더 깊은 어둠을 느꼈다내가 지쳤다는 것을 표현하는 방법은 많았다여기저기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작법은 똑같은데 영화 시나리오나 써 볼까 하다가작사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실용음악 학원을 다닌 적도 있다이름난 코미디 쇼의 구성 작가 면접을 보러 간 날은 짙고 검은 추위에 그저 섧었다부모님 품으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도 서너 계절간 내 곁에 머물렀다그렇게 5년을 흘러 도착한 곳은 넓이도 깊이도 짐작할 수 없는 먼 바다와도 같은 곳이었다사위(四圍)가 뚫려 어느 쪽으로든 자유롭게 갈 수 있는 듯 보이나 난 그 어디로도 출발할 수 없었다적도의 바다였나 보다파도가 없었다내 안에서 더는 어떤 동요도 일어나지 않았다고요하고 쓸쓸했다나약하고 무기력했다있는 힘껏 손을 뻗어도 그 손을 잡아 줄 누군가가 없을 것 같았다그래서일까고작 버스 한 번 잘못 탔을 뿐인 그 사소한 일에 서러운 울음을 삼킨 이유가내 삶에서 길을 잃은 것을그날의 나는 알았나 보다.

 

기사님의 쉬는 시간은 담배 한 개비로 끝났다버스로 돌아온 기사님은 시동을 걸고 다시 떠날 준비를 했다덤덤한 척하지만 둘 곳 잃고 떠다니던 내 시선이 룸 미러 속 기사님 얼굴에 가닿았다다행히 기사님은 내게 관심 없는 듯했다눈물은 닦아 없겠지만 부은 눈이 부끄러울 뻔했다요금을 다시 내야 하는지 여쭤볼까 고민하는데 기사님이 대수롭지 않은 듯 한마디 건넸다.

 

뻐스 잘못 타가 삥삥 도는 사람 숱합니데이.”

 

웃음조차 없이 무심한 목소리였다혼잣말인가도 싶은 것이 위로하려 꾸민 말은 아닌 듯했다외려 위로가 되었다겨우 삼킨 울음을 토해 낼 뻔했다그 시절의 내가 절실히 듣고 싶은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민정 님 경기도 오산시 

 

     

댓글 쓰기

댓글 (7)

러블리금은보화
2018.11.16
기사아저씨 나름대로 위로하신거 같네요. 사람은 위로받아야 힘이 얻고 다시 한 발 한 발 일어나는거 같아요
힘내세요!!
고티
2018.11.19
저도 버스를 잘 못 타서 종점까지 간적이 있어요.
그 때 생각이 많았어요. 생각이 많으면 버스를 잘 못 타기도 하구나. 생각했죠..
다음에는 일부러 아무 버스나 타고 종점까지 갔다오는 버스여행을 했어요.
그러면 머리속에 복잡한 생각들이 하나 하나 정리가 되더라고요.
글을 잘 쓰시네요. 성공하실 거예요..
koris74
2018.11.20
삭제
님아 떠나지 마오 길을 잃은 그 곳을 떠나지 마오
두다다쿵
2018.11.23
삭제
기사님이 배려많이 해주셔네요
어른도 모르면 물어볼수 있는데 그건 부끄러운게 아닙니다 오히려 모르는데 아는척 하는게 부끄러운거 아닐까요? 
효.
2018.12.05
삭제
공감가는 글이였어요~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화이팅!
2018.12.06
삭제
와 버스에서 읽고 울컥했습니다. 글 너무 잘 쓰십니다. 진짜 예술가시네요.
레베카
2019.02.02
삭제
이미 님이 내릴 정류소는 정해져 있는것 같아요~~그걸 이렇게 시적으로 표현하시는 능력이 탁월하시니 ㅎ
부럽네요...저도 얼마나 삥삥 돌고 다녔는지~
그 기사님의 무심한 듯 위로의 말이 제게도 많이 위로가 되네요ㅎㅎ

같은 카테고리의 글들

이달의 좋은생각
[오늘의 만남] 서먹해진 사람에게
2019.04.08   조회수 : 538    댓글 : 1개
가정의 달 5월이다. 누군가에겐 사랑과 온기를 나누는, 기다려 온 달이겠지만 가족이나 연인, 지인과의 관계가 서먹해져 오히려 더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꽃이나 아이스크림을 들고 함박웃음 지으며 옹기종기 정을 나누는 이들을 보면서 ‘저 자리에 누구와 같이 있어야 하는데.’라는 아쉬움을 느끼거나, ‘나만 빼고 모두 행복한 것 같아.’라는 생각이 든다면 더 늦기 전에 서먹해진 사람에게 마음을 표현해 보는 게 좋겠다. 하지만 막상 마음먹어도 직접적으로 말을 꺼내는 것은 왠지 어색하다. 자연스럽게 내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은 없을까?멀어진 그 사람이 무엇을 좋아했는지 떠올려 보자. 음식? 책? 액세서리? 영화? 운동? 하나 이상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직접 말 걸기가 쉽지 않다면 문명의이기인 휴대 전화를 이용해서 정중히 초대 문자 메시지를 보낸다.예를 들면 “아버지가 좋아하는 대구탕집을 발견했어요. 주말에 같이 외식하실래요?” 혹은 “서점에서 네가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을 봤어. 뭐, 내가 사다줄 수도 있고.” 같은 내용이 될 것이다. 다행히 초대에 응하면 이후에는 만나서진솔한 대화를 나누면 된다. 금방 응하지 않더라도 정중하고 사려 깊은 초대에 기분 나빠 할 사람은 없다. 어느새 상대방은 당신에게 다시 마음을 열기 시작할 것이다.누군가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기억한다는 건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감동을 준다. 특히 맛있는 음식을 같이 먹거나, 자전거 타기처럼 신체 활동을 함께하면 서먹함이 빨리 사라진다.마주 앉아 대화하는 데 성공했다면 마무리까지 잘해 보자. 가장 먼저 할 일은 사과다(“너를 섭섭하게 해서 미안하고 안타까워.”). 다음에는 당신의 감정도 솔직하게 표현한다(“아버지 말을 들었을 때 내가 능력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속상했어요.”).이때 주의할 점은 ‘상대방이 그렇게 말해서’ 속상한 게 아니라 상대방의 말에 ‘내가’ 속상했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서먹해진 원인을 자신에게 먼저돌리는 이런 표현은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 내 마음도 제대로전달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이현수 님 | 힐링 심리학 아카데미 원장
이달의 좋은생각
[좋은님 에세이] 울보의 카네이션
2019.04.08   조회수 : 357    댓글 : 0개
‘내일이구나.’ 달력을 확인한 뒤 책에 끼워 둔 만 원 한 장을 조심스레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쪽지에 낯간지러운 글귀를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다 창밖을 보니 해거름이었다. 슬리퍼를 끌고 나선 시내는 퇴근하는 사람들로붐볐다.“찾았다.” 꽃집이 보이지 않아 편의점을 찾았는데 장미를 팔고 있었다. 옆에는 카네이션 꽃바구니가 가득했다. 가격표를 보곤 얼른 손을 뗐다. 한 송이에팔천 원이라니!차라리 꽃바구니가 낫겠다 싶은데 돈이 모자랐다. ‘통신사 할인 카드라도 들고 올걸.’ 덜렁 만 원만 챙긴 스스로를 탓했다. 고민하다 자리를털고 일어났다. 돈이 든 주머니는 무겁고, 빈손은 헛헛했다. ‘엄마는 꽃 싫어하니까. 지금 내가 주는 선물은 부담스러울 거야. 열심히 공부하는 걸더 좋아하겠지.’시내를 벗어날 무렵 개업한 피시방에서 경쾌한 음악 소리가 들렸다.그 앞에는 화환이 늘어서 있었다.네온사인 불빛에 빛나는 꽃들이 눈에 들어왔다. ‘한 송이 정도는 가져가도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나중에 버려지니까.’ 건물을 뱅뱅 돌며 사람이 오가는지살펴보았다. 몇 번을 돌고서야 겨우 손을 올렸다.“어서 오세요!” 그 순간 피시방 사장이 인사하며 나왔다. 나는 창피해서 고개를 숙이고 힘껏 내달렸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낡은 슬리퍼 밑창이 뜯어지면서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 것이 얼굴을 뒤덮었다. “울보야, 울보야.” 어릴 적 툭하면 우는 나를 놀리던엄마의 그리운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배정경 님 | 경남 양산시
이달의 좋은생각
[특집] 밤길
2019.04.08   조회수 : 437    댓글 : 2개
평생 그림을 그리며 살다가 나이 오십에 처음으로 이력서를 썼다. ‘끼니 걱정을 해야 할형편에 더 이상 그림 재료를 구할 수 없다.’라는 건 변명이고, 실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그림을 그리며 사는 일에 지친 것이 더 큰 이유였다. ‘그래, 여기까지만 하자. 이쯤 했으면할 만큼 한 거야.’ 애써 스스로를 위로하며 작업실을 정리하고 2교대 부직포 생산 공장에취업했다.내가 하는 일은 부직포 재료인 원사를 종류별로 계량해 기계에 넣는 것이다. 생산 시스템이 자동화되지 않아 일일이 사람 손으로 해야 하는 고된 작업이다 보니 육 개월을 버티는 사람이 없단다. 아니나 다를까, 일을 시작한 지 겨우 일주일 만에 젓가락질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손가락 마디마디가 아팠다. 손톱 주위엔 거스러미가 생기고 피가 맺혔다. 의자에 똑바로 앉기 힘들어 복대를 두르고 밥을 먹을 적마다 ‘이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으려나, 이렇게 살려고 파리 유학까지 다녀왔나.’ 하는 자괴감에 빠지기 일쑤였다.동료들은 그런 나를 보며 ‘언제까지 출근할 것인가.’ 내기를 걸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더 이상 물러설 곳도,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없었다. 삼 년간 병원을 내 집처럼 드나들며 산덕분에 지금은 전반적인 생산 공정에도 참여할 만큼 일에 적응했다.지난해 12월, 젊은 시절 함께 유학한 옛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소식이 끊긴 지 꼭 이십 년 만이었다. 내 연락처를 수소문하느라 애를 먹었다며 “지금 있는 곳이 어디야? 우리만나야지!” 하며 목청을 높이는데 눈앞이 캄캄했다. 나를 어떻게 보여 줘야 하나, 두렵고걱정되어 잠이 오지 않았다. 몇 번이나 약속을 취소하려 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역에 도착해 군중에 섞여 있는 친구를 어렵지 않게 찾아냈다. 친구는 눈앞에서도 나를알아보지 못하고 계속 두리번거리며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반가운 만큼 어색하고 불편한시간이었다. 아직도 선명한 청춘의 기억 앞에 지금 내 모습이 서글펐다. 저녁을 먹는 동안 친구의 얼굴에 언뜻 찬 기운이 스치면 ‘어쩌다 이렇게 망가졌니.’ 하고 나를 동정하는 것같아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아름답게 추억할 수 있도록 둘 걸 그랬다.’ 가슴 저리게 후회하며 친구를 밤 기차에 태워 보낸 뒤 집으로 돌아왔다. 가로등이 길을 훤히 비추었지만마음은 칠흑처럼 어두웠다.피카소를 꿈꾼 찬란한 시절이 있었다. 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잠시라도 행복하면 좋겠다는 아름다운 꿈을 꾸었지만, 막상 그 꿈에서 깨고 보니현실이 악몽 같았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누워 있는데 친구로부터 문자 메시지가 왔다.“자네를 보며 나도 다시 시작할 용기를 얻었네. 고마워, 자네는 역시 멋진 친구야.”열등감과 패배 의식에 눈이 멀어 아무것도 보지 못한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야간 근무를 하다 보면 유독 시간이 더디게 가는 날이 있다. 아무리 일해도 끝이 없고도무지 날이 밝을 것 같지 않은 날. 친구를 다시 만나면 꼭 하고 싶은 말이 생각나서 메모지에 적어 놓았다.“아무리 깊고 어두운 밤이어도 그 끝은 언제나 새벽이었네. 우리 지금까지 그 길을 오십년 넘게 걸어오지 않았나. 몇 번이고 넘어져도 괜찮네. 길이 어두워서 그런 걸 어쩌겠나. 다시 일어나 걸으면 그뿐이라네.”김동규 님 | 충남 천안시제14회 '생활문예대상' 대상 - 밤길
이달의 좋은생각
[햇살마루] 끝말잇기 끝판왕
2019.04.08   조회수 : 408    댓글 : 2개
지난 2월 말 가족 모두 제주도에 다녀왔다. 방학인데 아이들과 제대로 놀아 주지 못한 미안함 때문에 계획한 여행이 아닌, 이번에야말로장인어른을 꼭 찾아뵈어야 한다는 심정으로 부랴부랴 준비한 일정이었다. 올해 예순다섯인 장인어른은 아직도 현장에서 폴리염화 비닐(PVC) 주름관 같은 자재를 직접 손에 잡고 일하는 배관공이다. 일의성격상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석 달 혹은 육 개월씩 숙소 생활을하곤 했다. 재작년에는 줄곧 강원도에서 일하다가 작년 봄 훌쩍 제주도로 떠났다.“임금은 박한데, 그래도 제주도잖니. 구경 실컷 하고 또 너희가 놀러오면 내가 가이드도 하고…….”그렇게 말하고 떠난 제주도여서인지는 몰라도 장인어른은 예전보다부쩍 자주 전화를 걸었다. 통화가 끝날 즈음엔 늘 “언제 한번 안 내려오니?”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때마다 “네, 한번 갈게요.” 하고 인사했지만 그 약속을 쉽게 지키지 못했다.지난 연말, 일 때문에 외국에 나갈 일이 있었는데, 어찌어찌 자리가생겨 아내도 동행하게 되었다. 아직 초등학교에 다니는 세 아이가 걱정이었지만 사정을 들은 장모님이 열흘 넘게 우리 집에서 대신 돌봐주기로 했다(장모님은 아내가 외국에 나가는 일이라면 언제든 당신이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문제는 외국에서 돌아온 직후 생겼다. 장인어른이 냉랭한 목소리로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외국에 나갈 시간은 있고 제주도에는 한 번도 오지 않는구나.”아내가 “아니, 그게 아니고 아빠.” 하며 변명했지만 장인어른은 서운함을 감추지 않았다.“놔둬라, 남자란 나이를 먹으나 안먹으나 그냥 다 애야. 저절로 풀리니까 너무 애쓰지 마.”장모님은 그렇게 말했지만 사위 된입장에서야 어디 그런가? 아내에 이어 내가 바로 전화했지만 장인어른은쉬이 마음을 풀지 않았다. “알았네,피곤하니까 다음에 얘기하세.” 그 말이 전부였다.아아, 이거 큰일이구나. 나는 장인어른과 통화를 끝내자마자 제주도행비행기를 예약했다. 어쨌든 내가 무심했던 게 맞으니까. 그건 변명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나는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제주도에 내려가 장인어른을 뵙고 함께 마라도도 가고, 이중섭 미술관을 둘러보고 흑돼지구이로 저녁을 먹었다. 그런데도 장인어른의 표정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아이들과 얘기할 때는 영락없는 돌하르방처럼 웃는 모습이었지만, 우리 부부가 말을 걸면 다시 딱딱한 화강암이 되곤 했다. 장인어른의 그런 태도 때문인지 아내는 쉽게 지쳤다.첫날 일정을 모두 끝내고 렌터카를 이용해 숙소로 돌아오는 중 아내는 기어이 깊이 잠들어 버렸다. 아내마저 잠이 드니 장인어른과 나 사이엔 더욱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깬 건 둘째 아들이었다.“할아버지, 아빠, 우리 끝말잇기 해요.”첫째와 막내 또한 엄마를 따라 잠들어 버렸고, 차에는 오직 나와 장인어른그리고 초등학교 3학년인 둘째만 깨어 있었다.“우리 손자가 하자면 해야지.”조수석에 앉아 있던 장인어른은 자세를 고쳐 앉으면서 바로 응답했다. 그러니 나 또한 어쩔 수 있나. 순서는 ‘나, 둘째 아이, 장인어른, 다시 나’ 하는 식으로 돌아갔다.처음 나는 별생각 없이 운전대를 잡은 채 끝말잇기를 했다. 내가 “제주도!”하면 둘째 아이가 “도라지!” 하면서 받고, 장인어른이 바로 “지하철!” 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순서가 몇 번 돌아가자 장인어른의 말을 받아 끝말을 잇는다는것이 어쩐지 어색했다. 마치 꼭 장인어른을 게임에서 이기려 드는 것만 같고.그래서 나는 그 모든 것을 둘째 아이 선에서 끝내려고 마음먹었다. 마침 장인어른이 ‘한라산!’으로 바통을 넘긴지라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둘째 아이에게 ‘끝장 단어’를 날렸다.“산기슭!”그래, 이제 조용히 숙소로 가자. 장인어른의 마음은 내일 또 풀면 되지. 나는비로소 게임이 끝났다 생각하며 안도했다. 하지만 그런 내 기대는 둘째 아이의입에서 튀어나온 단어 하나로 모두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산기슭…… 산기슭…… 그럼 나는 슭을 놈!”그 말 덕분에 장인어른과 나는 한참 동안 마주 보며 웃었다(다행히 신호 대기중이었다). 그 웃음이 우리를 다시 예전으로 되돌려 놓았다. 둘째에게 고마웠다. 그렇게 모든 것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고 생각하는 순간, 장인어른이조용히 입을 뗐다.“놈팡이!”끝말잇기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이기호 님 | 소설가
이달의 좋은생각
[오늘의 만남] 인턴 상인
2019.03.11   조회수 : 816    댓글 : 0개
작년 9월부터 엄마의 일터에 나갔다. 흔히 생생한 삶의 현장을 말할 때 가장많이 떠올리는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 그중에서도 도·소매를 주로 하는 청과직판 시장이다.취급하는 품목은 대파, 쪽파, 실파. 주 거래처는 식자재 납품 업체, 마트, 외식 체인점, 식당, 레스토랑 등이다. 경매가 이루어지는 저녁에 업무를 시작해심야, 새벽, 아침까지 많은 손님이 오간다.이곳에 주 5일 근무는 적용되지 않는다. 취급 품목이 농산물이라 쉬는 동안파가 자라면 상품성이 떨어지기 때문. 그래서 공휴일에도 일한다. 그나마 오래쉬는 날이 명절인데 대목이라 그 전에 평소보다 두 배 이상 바쁘다.18년간 직장인으로 일하다 인턴 상인이 된 나는 노동의 정직함을 몸소 느꼈다. 직장에 다닐 땐 열심히 일해도 보상받지 못하거나 혹은 그 반대의 경우도수두룩했다.한데 이곳에서는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생기지 않았다.경매된 물건을 사 와서 가게에 진열하고, 마진을 붙여 손님에게 팔고, 물건을봉투에 담아 묶는 것부터 손님 차량에 배달할 때까지 몸을 움직여야 했다. 요새는 손질한 물건을 사는 손님이 꽤 많은데 수고가 들어가니 마진도 높다. 우리 가게에서도 대파나 쪽파를 까서 판다. 엄마와 나는 영업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계속 다듬는다. 노력한 만큼 물건은 돈으로 바뀐다.그렇다 보니 이곳 상인들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이들은 삶의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고 자신의 노력과 정성으로 이만큼 자리 잡았다. 짧게는 십 년, 길게는우리 부모님처럼 삼십 년 이상 장사했다. 경기가 한창 좋을 때 돈도 많이 벌어봤고 그 돈으로 자식들 공부시키고 집도 장만했다.내가 처음 출근했을 때 “뭐하러 딸내미 데리고 나와 고생시키냐.” 하는 말도들었다.하나 대부분 부모의 가게를 이어받으려는 것을 부러워했다. 상인들은격려와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실제로 나보다 어리거나 비슷한 연배의 사람들이 일찌감치 이쪽으로 진로를 정해 일하고 있었다.이제 인턴 상인으로 6개월, 걸음마 단계다. 시장은 상인으로서뿐 아니라 한인간으로서도 배울 점이 많다. 앞으로의 시간이 궁금해진다.최경미 님 | 농산물 유통인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