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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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좋은생각

[햇살 마루] 징검다리 위에 서서

순천 시내를 지나는 동천에는 두 개의 징검다리가 있다. 두 징검다리는 일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다. “안녕.” 두 징검다리에 인사하는 것으로 나의 하루는 시작된다. 상류 쪽 징검다리에는 모두 서른네 개의 디딤돌이 있다. 디딤돌은 웬만한 고인돌 크기다. 두 사람이 마주 보며 강을 건널 수 있다. 네 번째 디딤돌 앞에 멈춰 서는 걸 좋아한다. 물봉숭아와 고마리 떼 꽃들, 부평들이 어울려 자란 곳에는 물고기들이 모여 노는 작은 풀이 있다. 물고기들은 한자리에 모여 노는 공식이 있다. 머리를 모두 상류 쪽으로 향하는 것. 헤엄을 칠 때도, 잠시 멈춰 꼬리를 흔들 때도 예외가 없다. 죽은 물고기만 물살을 따라 흐른다.

 

나란히 멈춰 서서 꼬리를 흔드는 물고기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언젠가 이들 모두 자신만의 샹그릴라(이상향)를 찾아 어도를 넘고 댐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를 향해 힘차게 도약할 것이다. 디딤돌에 앉아 물고기들에게 비스킷을 준다. 조금씩 가루로 뿌려 주는 것이다. 어린 물고기들은 아이처럼 과자를 좋아해 금세 모여든다. 큰 물고기들은 관심 없다. 종이컵의 커피도 조금 흘려보낸다. 그들 중 한 친구가 ‘인간이 마시는 이 액체의 냄새가 나쁘지는 않군.’ 하고 생각하길 바라는 마음이 내게 있다.

 

지난 여름날 이야기다. 물고기들이랑 놀고 있는데 한 사내가 징검다리를 건너왔다. 사내로부터 눈을 뗄 수 없었다. 정신이 얼얼해졌다. 사내는 검은색 시각 장애자용 안경을 쓰고 있었다. 지팡이 끝에 달린 하얀 쇠붙이로 톡톡 디딤돌을 두드리며 차례로 징검다리를 건넜다. 새벽녘에 내린 비로 강물은 조금 불었고 물에 한 차례 잠긴 징검다리는 미끄러웠다. 

 

달려가서 손을 잡아 주어야 하나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강을 건너는 모습을 그냥 지켜보기로 했다. 왠지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다. 그가 나를 지나쳤다. 디딤돌을 세 개만 더 건너면 끝. 물봉숭아꽃과 고마리 떼 꽃들이 긴장하여 사내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 같았다. 아주 짧은 순간 그가 디딤돌에서 미끄러져 물꽃들 위에 쓰러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도강을 축하하는 꽃다발을 그에게 안겨 주고 싶었기에. 강 건너편 도심의 낡은 2층 건물에 봉순 안마 시술소 간판이 있다. 그가 일하는 직장이 아닐까 잠시 생각해 본다.

 

강을 건넌 그는 둑실 마을로 향하는 샛길로 들어섰다. 가난한 이들이 모여사는 산비탈 마을. 실명하기 전 그가 이 징검다리를 건넌 적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실명한 뒤에도 혼자 힘으로 징검다리를 건너며 지난한 현실의 꿈을 이어 가는 것 아닐까. 징검다리 위에 쭈그리고 앉아 강물을 본다. 여름의 어린 물고기들은 잘 자라 살이 토실토실하게 올랐다. 길이가 새끼손가락보다 짧았는데 어느덧 하모니카만큼 길어졌다. 북국에서 온 청둥오리들이 천천히 헤엄치는 모습도 썩 보기 좋다.

 

지난 한 해 지상엔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세계는 분쟁의 바다다. 종교 간의 대립으로 전쟁이 이어지고 흑백 갈등, 종족 갈등, 무역 갈등, 가난한 나라와 부자 나라의 갈등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예외가 하나 있다. 바로 한반도에 살고 있는 8천만 우리 겨레의 경우다. 70년의 불화를 털고 지금 따뜻한 평화의 손을 잡으려 한다. 지상의 인간들이 와글 와글 싸움질하는 가운데 오직 우리 민족만이 싸움을 그치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가려 하는 것이다. 긍지를 지녀도 좋을 일이다.

 

징검다리 위에 서서 물고기들의 춤을 본다. 모두 한곳을 향하여 온몸의 에너지를 모은다. 물고기들의 모습과 우리 민족의 모습이 닮았다. 혼자 힘으로 징검다리를 건넌 맹인 사내의 모습도 생각한다. 절망하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자신의 힘으로 징검다리를 건너는 사내의 모습 속에 우리 민족이 걸어가야 할 미래의 모습이 새겨져 있는 것 아닌지 생각해 본다.

 

곽재구 님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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