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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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좋은생각

[특집] 사내는 검을 들었다

4년 전, 가족의 생계 수단이자 나 자신의 존재 이유인 전파상을 접어야 할 상황에 놓였다. 나는 우울증에 시달렸다. ‘곧 일흔인데 이제 무엇을 하나?’ 잦은 상념으로 의욕이 사라지고 부정적인 생각만 야금야금 쌓였다. ‘이래선 안 돼. 나답지 않아!’ 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오랜만에 청소도 하고 공원을 걸었다. 바쁘게 움직이니 기분이 좋아졌다. 하나 곧 ‘운동하면 뭐해? 기분 좋으면 뭐하냐고?’라는 속삭임이 들려왔다.

 

내게 주어진 삶의 소중한 시간을 좌절과 우울로 흘려보냈다. 어느 날, 독립해 사는 딸이 전화로 뜻밖의 말을 했다. 요즘 ‘소설’을 쓴단다. “아빠, 처음엔 생각이 많아서 잘 안 됐는데 막상 시작하니까 의외로 잘 써져. 도입부를 메일로 보냈으니까 수정해 봐!” 설레는 마음으로 딸의 글을 읽었다. 내가 문학에 관심 있는 걸 아는 딸은 종종 “아빠도 글 한번 써 봐. 나보다 책을 많이 읽었잖아.”라고 말하곤 했다.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해 이웃이나 친지 집에 가면 으레 책꽂이에 먼저 눈이 갔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처럼 결말이 안타까운 명작을 읽은 뒤에는 내 멋대로 그 이후를 생각해 보았다. 스칼렛 오하라가 매정하게 떠난 레트 버틀러를 찾아가 사랑을 구한다든지, 포로가 된 조던이 탈출에 성공해 마리아를 다시 만난다든지. 행복한 결말을 찾아 상상의 나래를 폈다.

 

명작의 속편을 상상하는 건 얼마든지 하겠으나, 초등학교와 라디오 기술 학원 학력이 전부인 내게 소설 쓰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노트북 자판에 손가락을 올려 보았다. 그러곤 딸의 글을 수정했다. 한 문장, 한 문단……. “이럴 수가. 글이 써지네!” 글쓰기라곤 학교 작문 숙제밖에 해 본 적 없는 나는 희열을 느꼈다.

 

읽기와 수정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내 멋대로 이야기를 끌어가고 있었다. 마치 내가 글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 같았다.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유치한 글이라도 나의 혼이 스며든 생물인 것이다.

 

그런데 정작 놀랄 일은 따로 있었다. “저 시계 왜 저래?” 벽시계를 쳐다본 나는 순간 고장 난줄 알았다. 휴대 전화까지 확인하고서야 내가 여섯 시간 동안 의자에서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사실을 알았다. 불과 몇 쪽의 글을 썼을 뿐인데 말이다. “오, 이런!” 소름이 쫙 돋으면서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대체 이게 뭔 일이다냐?”

 

소설을 쓰는 것은 자신이 그리려는 ‘경이로운 세계’에 스스로 들어가는 일인 걸 깨달았다. 그곳의 대기를 호흡하며 함께 얘기하고, 은밀함을 엿보기도 하고, 때론 슬픔에 눈시울을 적시기도 하면서.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뿐 아니라 글을 쓰면 뻑뻑하게 녹슨 두뇌가 정비한 엔진처럼 부드럽게 돌아간다는 사실도 알았다.

 

내가 쓴 글을 보고 ‘어떻게 이런 단어와 서정적 묘사를 떠올렸을까?’ 싶었는데, 그건 오래전 읽은 책들 덕분이었다. 그때 얻은 표현력은 없어진 게 아니었다. 자주 사용하지 않아 녹슬었을 뿐.

 

창작의 기본 형식도 모르지만, 내 글이 활자화될 것도 아닌데 아무렴 어떤가. 그저 살아오면서 축적한 경험을 소재로 이야기를 지어 보고 싶다.

 

“사내는 손바닥에 침을 탁 뱉고는 검을 빼 들었다. 살비듬이 희끗희끗한 마른 팔뚝에 검푸른 핏줄이 얼기설기 불거진다. 말은 당장 튀어 나갈 듯 검은 갈기를 부르르 떤다. 사내는 칼끝을 앞으로 하고, 말 옆구리에 박차를 힘껏 가했다. 그리고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 풍차를 향해 질풍처럼 달려들었다.”

 

이찬수 님 | 경기도 성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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