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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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좋은생각

[햇살마루] 버스커 버스커

주말에 종종 산에 오른다산이 가깝고 많다불암산은 집에서 5분 거리고 수락산은 10분 거리다베란다에서 내다보면 사패산과 도봉산과 북한산이 한눈에 들어온다산에 안 오를 수가 없다나는 노원구 중계동에서 20년째 산다. 

 

산에 갈 때마다 놀란다참 많은 사람이 산을 오른다매번 놀라면서 매번 새롭다그 또한 산행의 매력이다알록달록한 등산복을 입고 스틱을 짚고 산에 오르는 사람들은 어쩐지 엊그제 지하철이나 버스 정류장에서 마주한 지친 사람들과는 사뭇 달라 보인다다른 사람들인가아닐 텐데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기다린 그 사람들이 맞을 텐데 훨씬 웃음이 많고 목소리가 활기차다산에 오르면 누구나 좀 달라지는 걸까. 

 

나도 그런 면이 없지 않다여간해서는 누군가에게 말을 걸지 않는 나도 산에서라면 예외다빤한 걸 일부러 묻고 빤한 대답을 들으며 즐거워한다. “비봉까지 얼마나 남았어요?” “거의 다 왔어요힘내세요.” 말하자면 이런 질문과 대답인데오르고 올라도 비봉이 멀기만 한때가 있다속은 셈인데도 자꾸 웃음만 나온다. 

 

없는 오지랖을 피운 적도 있다본격적인 등산로가 시작되기 전까지 펼쳐지는 완만한 산책로그곳에는 계곡물이 있고 공중화장실도 있고 때로는 찰옥수수와 쑥떡을 파는 이들이 있다도봉 서원터에서 천축사 가는 길로 접어들어 7분쯤 걸었던가그곳에 허름한 옷을 걸친 소프라노 색소폰 버스커(거리에서 노래나 연주를 하는 예술가)’가 있었다뉴욕 양키스 모자를 쓰긴 했어도 꽤나 나이 들어 보이는 남자분이었다그에게 가당찮은 오지랖을 떨었다. 

 

그를 그날 처음 본 것은 아니었다천축사 방향으로 오를 때 가끔 보았다그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무슨 곡인가를 하염없이 연주했다거의 외국곡이었는데 내가 어쩌다 노래방에서 부르는 내 사랑 내 곁에라든가 천년의 사랑〉 같은 곡이 나오면 발걸음을 멈추고 끝까지 들었다. 

 

그러다 하루는 그에게 다가갔다답답해서 그랬다그의 발치에 놓인 색소폰 케이스가 그야말로 발치에 놓여 있기 때문이었다뚜껑 열린 케이스에는 등산객이 던져 준 천 원짜리 두 장과 몇 개의 동전이 있었다. ‘사람들은 여기까지 다가와서 돈을 건네지 않아요좀 더 사람들이 다니는 쪽으로 케이스를 내어 놓아야겠어요.’ 

 

물론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그에게 목례로만 양해를 구하고 색소폰 케이스를 행인들 쪽으로 좀 더 가까이 옮겼다아니나 다를까옮기자마자 두 행인이 색소폰 케이스에 돈을 넣었다나는 그를 향해 보란 듯 미소 지었다깊게 눌러쓴 모자 그늘 속에서 그의 눈도 웃고 있었다생각보다 나이가 많은 분이었다. 

  

두어 달쯤 뒤에 다시 천축사에 올랐다그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고개를 숙이고 연주에 열중했다나는 연주보다는 색소폰 케이스에 먼저 눈이 갔다그럴 수밖에 없었다색소폰 케이스가 다시 그의 발치에 놓여 있었으니까그는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케니 지의 러빙 유를 연주했다케이스 안은 동전 몇 닢으로 다시 초라해져 있었다.

 

나로선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색소폰 케이스를 다시 행인들 쪽으로 밀어 놓을 만큼 나의 오지랖은 왕성하지 못했다그는 연주를 멈추지 않은 채 흘끗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쥐고 있는 몇 푼의 돈을 그의 색소폰 케이스에 슬그머니 떨어뜨렸다그는 그날과 똑같은 눈웃음을 나에게 지어 주었다러빙 유는 맑은 계곡물소리와 어우러졌다. 

 

내 거동을 누군가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노년의 버스커 곁을 물러나고서야 알았다소나무 그늘 바위에 앉아 러빙 유에 귀를 기울이던 중년 여성 등산객이 나에게 말을 건넸기 때문이다. 

 

색소폰 케이스를 행인들 가까이 내놓았죠?” 

어떻게 아셨죠?” 

내가 물었다. 

저도 그런 사람 중 하나니까요그게 훨씬 나아 보여서.” 

그런데 어째서 저분은 다시 발치로 끌어다 놓았을까요.” 

저도 그게 알고 싶어 이곳에서 자주 연주를 들어요그리고 이젠 왠지 알 것 같기도 하고요.” 

왜일까요?” 

연주자에게서 그 이유를 들었던 것도 아니고다만 제 생각일 뿐이니까굳이 말씀드리기가…….” 

자주 와서 들으면 저에게도 생각과 느낌 같은 게 생기겠군요.” 

내가 말했다. 

보세요오늘 연주도 흐트러짐이 없어요전혀 흔들리지 않아요.” 

그녀가 말했다.

 

구효서 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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