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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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좋은생각

[햇살 마루] 마가렛과 오동나무

지난해 겨울이었다.

“겨울에 차를 더 자주 마셔요. 달걀도 많이 먹고요.”

장작 난로 위 낡은 주전자에서 물이 끓고 있었다. 다른 계절에는 물 끓이는 전깃값이 아까워 차도 달걀도 별로 먹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미 날이 충분히 저물었다.

“왜 불을 안 켜세요?”

“아직 볼 만하잖아요.”

나는 답답했지만 조금 더 참아야 했다.

 

안방에는 혼자 누울 자리에만 전기담요가 자리 잡고 있었다.

“지난 추위에 하수도가 얼어 버렸어요. 수리비가 많이 들어 봄까지 기다리기로 했어요. 봄이 오면 막힌 관이 뚫리겠지요. 난 겨울이 좋아요.”

 

옷은 늘 비슷하거나 같다. 의자에 걸어 둔 옷을 한번 들어 보았더니 생각보다 훨씬 무거웠다.

“장수 읍내 시장에서 만 사천 원에 샀어요. 참 따뜻해서 좋아요.”

처음 만났을 때 값이 조금 나가는 목도리를 선물로 내밀었다.

“가져가세요. 이런 비싼 건 불편합니다. 시장에서 산 오천 원짜리 목도리가 너무 편하고 좋습니다.”

나는 포장도 뜯지 못한 채 그대로 들고 돌아왔다.

 

그녀는 ‘사랑’이라는 말을 함부로 쓰지 못하게 한다. 사랑의 숭고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아직도 ‘사랑’에 대한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그녀는 우리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 진주에서 귀한 외동딸로 태어났다. 간호 학교를 거쳐 간호사로 독일에 갔다. 그곳 병원에서 온갖 힘들고 궂은일을 하면서도 언제나 밝았다. 그러고는 그곳의 한국인과 결혼을 했고, 2남 1녀를 두었고, 식당을 차렸고, 내친김에 조그만 호텔까지 운영했다. 잘되었다. 아니 잘했다. 아니 무조건 열심히 했다.

 

어느 날, 파란만장한 자신의 과거와 호텔과 모든 자산을 정리하고 혼자 한국으로 돌아왔다. 장수군의 한 나지막한 마을 언덕에 조그만 집과 사과밭을 마련했다.

“사과 농사는 다른 사람이 짓고 있는데 한가지 조건이 있었어요. 사과나무에 약을 치면 안 된다는 것이었어요.”

 

어느덧 여름이 왔다. 일흔이 넘었지만 갈수록 몸이 좋아지고 있다. 마당가에 하얀 마가렛이 무리 지어 피어 있다.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모습이 어쩌면 저렇게 예쁘냐며 눈을 떼지 못한다. 제법 큰 오동나무 한그루도 그늘을 넓고 짙게 펼치고 있다.

  

그녀는 내가 쓴 《사랑의 인사》를 무척 좋아한다. 날마다 하나씩 읽으면서 ‘어떻게 이런 글을 썼냐’고 묻고 또 물었다. 그러면서 스스로 대답했다.

“정 선생과 내가 같은 경험을 많이 했나봐요.”

그러면서 여러 번 이렇게도 말했다.

“이 책에 더 이상 손대면 안 돼요. 더 이상 나올 게 없고 나올 필요도 없어요. 깊은 마음을 글로 꺼내 놓은 거예요. 따뜻하게 끌어내 주었어요.”

 

겨울 어느 날, 친구 직원과 장수에 갔을 때였다. 대화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그녀 얼굴이 빨갰다.

“오늘은 정 선생이 와서 그런지 얼굴이 빨갛네요?”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정 선생한테 안 좋아요.”

말은 부드러웠지만 냉엄한 경고였다. 얼굴이 빨개진 건 난로 때문이었지만, 잘못된 칭찬은 사람을 버린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녀를 볼 때마다 넋을 잃는다. 그런중에도 나는 한마디도 놓칠 수 없다. 한마디 한마디가 명언이고 지혜다.

“말이 중요하다, 언어가 정확해야 한다.”

“어지러운 세상 내가 감수하면 자유로워진다.”

“정치는 말 공장이다. 멀리하라.”

“쉬운 것은 늘 도움이 안 된다.”

“자기가 하는 것만큼 남도 그럴 줄 안다.”

“겨울을 좋아하면 추위를 이길 수 있다.”

“좋다고 생각하면 자기 것이 된다.”

“부족함이 많다고 느끼기에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은 것은 집중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내 삶이다. 불편해하지 말자.”

“몸을 움직여라. 그러면 스스로 치유된다.”

 

그녀는 《사랑의 인사》 1만 5천 207부「좋은생각」 24만 부 이상을 교도소, 다문화 가정, 문해 학교, 초·중·고 교사와 학생 등에게 어떤 조건도 부담도 없이 보내주었다.

내가 물었다. 

“한두 번은 몰라도 어떻게 이렇게 꾸준히 하세요?”

“두 분의 아버지가 보고 계시잖아요. 육신의 아버지와 영원한 아버지.”

 

그녀를 두고 대단하다거나 위대하다거나 숭고하다는 말은 할 수 없다. 아름답다고 하면 어떨까? 아마 이 말도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 자신을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높이면 불편해하기 때문이다.

 

자연스럽다. 그녀는 그냥 그렇게 산다.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하고 있고, 그렇게 살 것이다. 이것이 그녀의 충만한 기쁨이다. 생명력이다.

 

비단 박순련 님뿐이겠는가? 좋은님 한 분 한 분이 이렇게 살고 있다. 그들은 좋은 삶을 살겠다고 약속하지 않는다. 이상도 도덕도 양심도 아니다. 그냥 그렇게 산다. 원래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을 조용히 그리고 성실히 살아 내는 것이다. 무엇이 이보다 더 소중하고 아름답겠는가? 그저 고마울 뿐이다.

 

정용철 「좋은생각」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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