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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좋은생각

[햇살 마루] 고양이의 농사법

새벽에 불을 켜자 돈벌레 몇 마리와 거미들이 몸을 감춘다. 이 녀석들은 특별하게 피해를 주지 않기에 죽이지 않고 그냥 둔다. 설령 피해를 주는 벌레라 하더라도 함부로 할 수는 없다. 어느 생명체 건 목숨과 목숨은 동등하다.

 

닭 울음소리와 범종 소리가 거의 동시에 들려온다. 종소리는 규칙적이고 새벽닭 소리는 함부로 흩어진 수은 구슬 같다. 매화도 지고 목련꽃도 졌다. 수선화도 지고, 패모꽃도 이울었다. 골담초와 보리수의 철이다. 오랜만에 집 안을 둘러본다.

 

이 집에는 참 많은 것이 산다. 아내와 내가 집의 주인이라고 등기를 해두었지만, 실제로 이 집의 주인은 풀과 나무와 곤충과 쥐나 뱀, 고양이와 새들이다.

 

그들이 더 오래 머물고, 그들이 더 많이 사용한다. 다 따서 모으면 한말은 족히 나올 보리수 열매는 곤줄박이나 뱁새들의 것이고, 살구나 매실은 까치들이 독차지한다. 홍시는 산까치, 고구마는 두더지가 주인이다. 등기상 주인들이 열매를 따는 경우는 별로 없다. 이것은 ‘꼭 필요하지 않은 것이라면, 꼭 필요한 이들이 가져가게 해야 한다’는 아내의 철학이 반영된 결과다.

 

누군가 준 목련꽃 차가 마실 만했다. 그래서 집에 있는 목련 나무가 활짝 꽃 피웠을 때 “목련꽃 차를 만들까?” 하였더니, “뭐하러 그래요. 저도 저 꽃 피우느라 얼마나 애썼을 것인데…….” 아내의 그 한마디에 나는 입을 다물어야 했다.

 

농사를 본업으로 하지 않는 가짜 농부인지라, 밭이고 공터고 간에 심고 싶은 것을 조금 심고는 방치하였다. 그러다 보니 키 높이로 풀이 자라는 건 보통이었다. 내가 겨우 할 수 있는 것은 마당의 잔디밭을 예초기로 한 번씩 미는 정도였다. 마당에는 수시로 뱀이 지나다니고, 다양한 종류의 거미가 온갖 곳에 집을 쳤다. 한번은 작은 뱀이 거미줄에 걸려 살려 준 적도 있다.

 

수시로 드나드는 고양이들은 쥐나 뱀을 잡아서 현관 앞에 선물로 놓기 일쑤였고, 두더지들은 나보다 부지런히 밭을 갈아 두었다. 비 온 뒤면 두꺼비가 뛰룩뛰룩 눈을 굴리며 마당을 가로질러 가고, 허술하게 지었던 닭장의 닭을 족제비가 채 갔지만 닭장을 보수한 후 키운 닭이 날마다 알을 내어 준다.

 

닭 울음소리가 잠잠해지면 꿩이 꿩꿩 하면서 허공을 가른다. 새벽 새들의 출현 시간에도 순서가 있다. 큰 새들이 먼저 소리를 낸 후 작은 새들이 지저귀기 시작한다. 이윽고 해가 뜰 무렵이면 가장 작은 새들이 햇살 쪼가리 같은 소리를 쫀다. 이 집에 오는 새의 숫자를 다 헤아리면 수백 마리는 족히 된다. 인근에 아파트 공사가 시작되면서부터 더 늘어났다. 새가 많아진 후 집 안 과일나무에서 열매 따는 것을 멈추었다. 원래부터 내 것이 아니었으니, 그것을 더 필요로 하는 자가 먹는 게 마땅하다는 생각이다.

 

작년 초에 두둑을 완성했다. 그 가을에 두둑마다 다른 채소를 심었더니 잘 자랐다. 두 두둑의 배추는 봄동으로 먹으려고 아껴 두었으나, 누군가가 하나둘씩 싹둑 잘라 가더니, 오십 포기 가까운 봄동이 다 사라졌다. 그래도 손님이 왔을 때 우리 가족도 한 포기는 맛을 봤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나보다 더 필요한 사람이 잘라 갔을 것이다. 봄동이 없어도 두둑마다 들나물이 넘쳤다. 참나물과 당귀와 재래 당귀와 방아와 무들이 있었다. 그중 시금치가 특히 잘 자랐다. 작은 두둑 하나인데, 왕성히 자란 그것들은 한 식구가 먹기에는 많은 양이었다. 다른 사람과 나누어 먹으려고 시금치 잎을 수확했더니 열 묶음도 더 되었다.

 

“어쩌다 당신이 시금치 농사는 잘 지으셨네요?”

아내가 말했다. 나는 빙그레 웃음으로 대답했다. 시금치 농사가 유독 잘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나는 두둑을 만들고 씨만 뿌려 두었지, 농사는 고양이가 지었다. 작년 가을 시금치를 심은 뒤에 보니 집을 드나드는 고양이 녀석들이 유독 그 두둑에다 똥을 숨기는 것이었다. 그걸 안 나는 시금치 두둑 옆에 고양이가 먹을만한 것들을 부지런히 갖다주었다. 고양이는 주로 자기가 좋아하는 것(쥐나 뱀 등)을 선물로 주고, 상대가 좋아하는 것을 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가 필요로 했던 시금치를 선물로 듬뿍 준 것이다.

 

올가을에는 시금치를 심었던 두둑에 무얼 심을까. 고민이 굼실굼실 아지랑이처럼 고무락거리는 늦봄이다.

 

이대흠 님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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