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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좋은생각

[햇살 마루] 어머니에게도 어머니가 있어서

이란의 시인 알리레자 가즈베가 쓴 〈어머니〉라는 시가 있다. “어머니만 하실 수 있어요!/ 이 겨울에 뜨신/ 모자를 산에/ 장갑을 나뭇가지에/ 목도리를 강에 씌워 주실 수 있어요!” 어머니의 무한한 사랑이 잘 느껴지는 멋진 시다.

 

내 어머니는 아주 가끔 당신의 어머니 얘길 한다. 내가 외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뵌 게 언제쯤이었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중학생 때가 아니었나 싶다. 내게 외할머니는 여름 방학 때마다 내 가족이 살던 경북 금릉군 봉산면 태화2리 시골집으로 오는 분이었다. 아주 커다란 사탕 봉지와 여러 종류의 과자가 담긴 종합 선물 세트를 보자기에 싸서 묶어 왔다. 왜 하필 외할머니는 그 무더운 여름날만 골라서 왔는지 알 수 없었으나 우리 집 마루에 올라앉아서는 한참을 가쁜 숨을 고르고 땀을 식혔다. 그렇게 한여름의 하루 이틀 동안 시집 간 딸이 사는 곳에 다녀가는 게 전부였다.

 

어머니는 지금 어머니가 시집와서 쉰 해 넘게 사는 곳의 바로 옆 동네에 살았다. 말하자면 옆 동네에서 우리 동네로 시집온 것이었다. 외삼촌은 초등학교가 있는 그 옆 동네에서 이발사를 했다. 아버지가 그 이발소에 몇 차례 다녀갔고, 그때 잠시 잠깐 어머니를 만난 적이 있다고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중매를 통해 결혼하긴 했어도 예전 어느 날에 우연히 들으니 몇 차례 편지가 오간 적이 있긴 했단다. 그리고 그 편지를 사촌 누나가 중간에서 전달했다고 한다.


두 분이 혼례를 올리긴 했지만 신혼살림은 몹시 어려웠다. 비빌 언덕이 없었다. 천수답 두어 마지기가 살림의 전부였다. 기울어 가는 시골 농가, 그것도 남의 집 한 칸 허름한 방을 빌려 살림을 시작했고, 먹고사는 일은 남의 농사를 도와주는 것으로 장만할 수 있었다.


근년에 어머니가 이 시절의 일을 내게 말하면서 잠깐 외할머니 얘길 했다. 밭이라고 할 만한 곳도 아닌 곳을 일궈서 식구가 먹을 푸성귀를 마련했는데 그곳을 손볼 틈조차 없이 매일매일이 고된 일로 바빴다. 그래서 아침밥을 먹기 전에 밭에 들러 풀이라도 매고 나물이라도 뜯어 오려고 찾아가면 꼭 그렇게 누군가가 먼저 다녀가서는 고랑 고랑을 깔끔하게 매 놓았더라는 것이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옆 동네에 살던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어머니보다 더 이른 시간에 밭을 손보고 갔다는 것이다. 먹고살기에 너무 바쁜, 시집간 딸을 걱정해 이슬이 내리는 그 새벽에, 동이 트기도 전에 밭에 다녀갔을 두 분 얘기를 어머니는 꽤 차분한 음성으로 내게 말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여름에 한 차례씩 농사짓는 딸의 집을 다녀간 것도 외할머니에겐 이른 새벽에 딸의 밭에 들러 밭을 매 놓고 가는 것과 엇비슷한 일이었을 것이다. 외할머니가 여름날 와서 두어 밤을 주무시는 동안 어머니는 옥수수를 쪄 내고, 칼국수를 밀고 삶아 어머니의 어머니를 모셨다. 넉넉한 밥상은 아니었지만 기른 것들로 찬을 만들었다. 내 기억으로는 꽤 귀하게 둔 마른 명태를 꺼내 손수 두드려 국을 끓여 내기도 했다.


어머니는 대구의 외갓집에 가끔 나를 보내곤 했다. 당시 외삼촌은 양계장을 하고 있었다. 양계장에 들르면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조약돌보다 작은, 갓 낳은, 따뜻한 새알과도 같은 달걀을 내 작은 손에 쥐여 주곤 했다. 어머니는 당신의 아이를 어른들에게 보내어 그 무릎에 앉히는 일로 당신의 소식을 전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예전에는 이런 생각을 자주 못했지만, 요즘엔 어머니에게도 어머니가 있었다는 생각을 이따금씩 한다. 내 어머니가 점점 연만해질수록 생각을 더 자주 하게 될 뿐 아니라, 외할머니에게 더 많은 것을 묻고 더 많은 것을 해 달라고 하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기도 한다.

 

‘어머니’라는 말은 그 속이 아주 깊은 그 무엇 같다. 그 속의 밑을 다 볼 수 없다.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눈물에 가려 더 들어갈 수 없고, 마음에 벅차서 더 들어갈 수 없고, 그립고 그리워서 그 존재의 끝에 다다를 수 없다. 내게 어머니가 그런 것처럼, 어머니에게도 어머니가 있어서 마찬가지로 그러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에게 외할머니에 관한 일을 먼저 여쭙지 않는다. 어머니가 지나가듯 말하길 기다릴 뿐이다. 

 

문태준 님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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