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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좋은생각

[특집] 오 나의 슈퍼

이사한 지 어언 일 년이 지났다. 이곳은 내가 초등학생 때까지 이모네가 살았던 동네다. 일 년에 한두 번씩 들른 기억이 난다.

당시 이모네는 차 한 대 들어가기 힘들 정도로 좁은 골목에 있는 벽돌집이었다. 산으로 둘러싸여 어릴 땐 이모가 시골에 사는 줄 알았다.

십오 년이 지난 지금 이 동네에는 높은 아파트와 흰색 건물이 잔뜩 들어섰다. 하지만 여전히 자리를 지키는 것들도 있다. 목욕탕과 제과점 그리고 슈퍼다. 편의점이 아닌 슈퍼. 특히 우리 집 앞 현대슈퍼는 내가 이 동네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다.

 

이사 온 첫날, 물을 사러 슈퍼에 갔다. 문을 열자마자 작은 종이 울리며 내가 왔음을 알렸다. 주인으로 보이는 할아버지는 “처음 보는 얼굴인데? 이사 왔구먼.” 하며 단박에 내가 낯선 사람임을 알아챘다. 며칠 뒤 들렀을 땐 할머니가 있었다.

“할아버지가 말한 그 처자구먼. 새로운 동네에서 잘 살길 바랄게요!”

우리 가족을 반겨 주는 것 같았다.

 

슈퍼는 늘 새벽 다섯 시에 문을 열고, 자정에 닫는다. 그 시간이면 어김없이 셔터를 올리고 내리는 드르륵 소리가 난다. 이건 단골만 아는데, 아침잠이 없는 할머니가 새벽에 문을 열면 할아버지가 오전 아홉 시쯤 나와 바통을 이어받는다. 열두 시에 할머니가 점심밥을 챙겨 나오면 같이 식사하고 번갈아 자리를 지킨다. 저녁 일곱 시에 저녁을 먹은 다음 할머니가 먼저 들어가서 자고, 자정까지 가게를 보던 할아버지가 셔터를 내리면 슈퍼의 하루는 끝난다.

 

지난여름, 온 동네가 정전이 됐다. 안 그래도 열대야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할 때였다. 엄마를 비롯한 동네 사람들은 하나둘 슈퍼로 모여들었다.

슈퍼 할아버지가 마을 이장님처럼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전력 공사에 전화를 걸어 사실을 알렸다. 사람들은 기술자가 올 때까지 집에 들어가지 않고 한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함께 더위를 견뎠다.

 

요즘엔 슈퍼에 가기 망설여질 때가 있다. 택배 때문이다. 이사 온 후 처음 택배를 시켰는데 한참이 지나도 안 오는 거다. 이상하다 싶어서 연락하니 ‘현대슈퍼에 맡겼다.’고 했다. 맡겨 달라 한 적도 없는데 왜 거기에 있는지 의아했다.

 

“택배가 여기 있다고 해서요.”

슈퍼에 가서 얘기하자 할아버지가 자연스럽게 말했다.

“저기서 찾아가.”

할아버지는 손으로 택배함을 가리켰다. 거기엔 택배가 이미 수북이 쌓였다. 아파트처럼 경비실이 따로 없어 받는 사람이 부재중일 때 다들 이곳에 택배를 맡긴다고 했다. 우리 동네의 암묵적인 규칙이다. 

믿을 만한 곳이라 안심되지만, 택배만 달랑 가져오기가 그렇다. 뭐라도 사서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은데 마땅한 게 없다. 그래서 갈 때마다 과자 한 봉지, 아이스크림 하나씩을 사 온다. 가장 덜 머쓱하게 마음을 전하는 방법이다.

 

어느덧 자정에 셔터 내리는 소리는 잘 시간을 알려 주는 알람이 됐고, 새벽 다섯 시에 문 여는 소리가 나도 더 이상 잠을 깨지 않는다.

가끔은 슈퍼에 들어가 할머니,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얼마 전엔 할아버지가 할머니 속을 꽤나 썩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오늘은 집에 가는 길에 미처 다 듣지 못한

할머니 이야기를 마저 들어야겠다.

 

최수희 님 | 경기도 고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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