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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이 일을 어쩌나
2018.01.08   조회수 : 1,032    댓글 : 0개

그와 나는 어릴 적부터 한동네에서 보던 사이였다. 우리 동네에 그의 큰집이 있었는데 방학이나 명절이면 그와 사촌들이 왔다. 그들 형제가 오면 동네 아이 모두 한 무리가 되어 뛰놀았다. 세월이 흘러 중학교에 입학한 뒤론 만날 기회가 뜸해졌다. 그의 큰어머니와 동네 친구였던 어머니를 통해 간간이 소식을 들을 뿐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하던 나는 뒤늦게 꿈을 찾아 나섰다. 대학을 나와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 역시 회사에 취직해 열심히 일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선을보긴 하는데 번번이 퇴짜를 놓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사실 나 역시 어머니 성화에 선을 보러 다녔지만 결혼할 생각은 없었다. 남몰래 집에서 독립할 생각만 하던 터였다. 방학 중 친구와 1박 2일로 여행을 다녀오는 길, 대문에 들어서자마자 그 차림 그대로 어머니 손에 이끌려 나갔다. 찻집에는 그가 앉아 있었다. 첫눈에 알아볼 만큼 어릴 때 모습 그대로였다. 

 

다른 자리에는 그의 부모님과 친척들이 앉아 우리를 훔쳐보았다. 어색한 만남이었다. 어쨌든 서로 결혼할 뜻이 없었던 터라 잘 보일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양쪽 부모님의 기대가 높았고 계속 결혼 독촉에 시달리는 게 지겨웠다.

 

우리는 서로 마음에 드는 척 합의하고 데이트를 시작했다. 마음이 없으니 상대 눈치를 보지 않고 평소대로 행동하며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 그러다 보니 싸움과 갈등이 잦았으나 겉으론 잘 만나는 듯 양가 부모님을 속였다. 노처녀, 노총각이 마음 맞아 잘되어 간다고 판단한 부모님들은 3개월 만에 덜컥 결혼식 날을 잡아 우리에게 통보했다.

 

그제야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각자 부모님에게 서로의 험담을 늘어놓았다. “고집 세고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해요. 좋은 며느릿감은 아니에요.” “그 사람은 자기가 이 세상에서 제일 잘난 줄 알아요. 게다가 얼마나 가부장적인지 몰라요.” 그러나 부모님은 이미 친척과 지인에게 알려서 돌이킬 수 없다며 청첩장을 내밀었다. 이 일을 어쩌나!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는 그를 배우자로 맞아들여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하늘이 노랗고 눈앞이 깜깜했다. 

 

그도 내 마음과 똑같다고 했다. 우리는 근처 포장마차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바닷가에서 함께 밤바람을 맞으며 이 난국을 어떻게 타개하느냐고 분개했다. 겉으로만 만나는 척하는 게 아니라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진심으로 시간을 보낸 것이다.

 

그러면서 그동안 보지 못한 그의 진솔하고 성실한 면을 조금씩 알았다. 그는 어려운 가정 환경에서 자라 돈을 함부로 쓰지 않는 알뜰한 경제관념을 가졌다. 어른을 공경할 줄 알고 형제간의 우애도 깊었다. 그는 내가 다른 사람의 말에 쉽게 현혹되지 않고, 열정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당당한 태도가 좋다고 했다.

 

우리는 우여곡절 끝에 6개월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28년째 부부로 산다. 물론 힘들고 어려운 일도 많았지만 서로의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존중하며 알콩달콩 재미나게 지낸다.

 

이연순 님 | 부산시 영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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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만남] 25년의 원동력
2018.01.08   조회수 : 878    댓글 : 1개
사실 처음 공채를 통과했을 때만 해도 나는 성우에 대해 잘 몰랐다. 방송국에서 작가, 엠시(MC), 리포터 등 닥치는 대로 일하다 성우 시험을 봤고 덜컥 붙었다. 합격은 무척 기뻤으나 막상 연수를 받다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만반의 준비를 한 동기들과 비교해 나는 할 줄 아는 게 없었다.연수 기간 동안 받은 단골 질문은 “왜 성우가 되었나?”였다. 동기들의 답은 절절했다. “네 살 때부터 성우가 꿈이었다.” “대기업 회장 비서직을 그만두고 삼 년을 준비한 끝에 붙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어쩌다 보니 성우가 되었다.”라고 말할 용기가 없었다. 나 또한 성우가 평생 꿈이었다는 거짓말 뒤에 숨어 속을 끓였다.드디어 사원 출입증을 받고 성우실에 입성하는 날, 동기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우울했다. 방송에 투입되면 분명 나의 모자람이 들통날터라 자신이 없었다. 결국 사표를 내기로 마음먹었다.성우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선배들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어서 와라.” “축하한다. 드디어 시작이네?” “여기 좀 앉으렴.” 나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눈을 뜨면 길거리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아저씨, 아줌마, 언니, 오빠의 모습인데, 눈을 감으면 여기저기서 멀더, 스컬리, 사오정, 짱구, 영심이가 말을 건넸다.그 엄청난 매력과 강렬함에 얼이 빠져 눈만 껌뻑대는 내게 샤론 스톤이 말했다. “어머, 우리 막내가 긴장한 모양이구나? 호호.” 그제야 나는 성우가 무엇인지 어렴풋하게나마 알았다. 성우는 인간의 모든 희로애락이 담긴 삶을 단지 목소리 하나로 표현하는 사람이었다.나는 사표를 안주머니 깊숙이 넣었다. ‘지금은 아니다. 한번 제대로 배워 보자. 사표는 그다음에 던져도 늦지 않다.’ 그렇게 성우라는 길에 올라섰고 25년이 흘렀다. 가끔 질문을 받는다. 지금까지 성우를 계속한 원동력이 무엇이냐고. 그때마다 떠오른다. 25년 전, 성우의 본질을 온몸으로 느꼈던 그 생경한 소리의 충격이. 그리고 덧붙인다. 어떤 직업이든 본질을 온전히 느끼고 이해하면 그 힘으로 오래 달릴 수 있다고.박형욱 님 | 성우
이달의 좋은생각
[좋은님 에세이] 눈이 내리면 어머니가 온다
2018.01.08   조회수 : 1,091    댓글 : 0개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면 당연히 고등학교에 가는 줄 알았다. 한데 고등학교 입학 원서를 아버지에게 가져다드리니 형을 불러 나를 데리고 서울로 가라고 했다.내 고향은 버스가 하루 세 번 다니는, 신작로에서 한참 더 들어가야 하는 외진 동네였다. 세 가구뿐인 주민은 한 가족같이 어울려 지냈고, 병풍처럼 둘러 싸인 산은 계절마다 먹을 것을 풍성하게 내주었다. 그래서 순박한 마음과 넉넉한 정을 지니고 살았다. 그 정겨운 곳을 떠나야 한다니. 아버지는 무엇이 그리 급한지 읍내에 나가 표를 끊어 왔다. 동네 형, 누나들은 무척 아쉬워했다.서울로 가기 전날 밤, 툇마루에는 보따리들이 나와 있었다. 어머니는 콧잔등에 얼음이 맺히는 것도 모른 채 분주했다. 내겐 눈길도 주지 않고, 무얼 물어봐도 시큰둥하게 말하며 시선을 피했다. 나는 아쉬움에 쉬이 잠들지 못했다.다음 날 아침, 한껏 들뜬 어머니 목소리에 잠에서 깼다. “오메, 이것이 뭔 일이다냐. 아따 겁나게 내려브네이.” 방문을 여니 굵은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마당에 선 어머니를 눈사람으로 만들 기세였다. 눈이 발목까지만 쌓여도 버스가 다닐 수 없는데, 그날은 토방을 다 덮을 만큼 내렸다. 어머니는 보따리에 싼 음식이 상하겠다고 푸념하면서도 목소리는 밝았다. 서울로 가는 날은 보름이나 미뤄졌다. 그간 나는 어리광 부리며 어머니 냄새를 맘껏 맡았다.함박눈을 맞으며 자식을 며칠 더 품을 수 있는 기쁨에 들떴던 어머니. 지금도 눈이 내리면 그해 겨울 어머니의 모습이 내 가슴을 두드린다.우정광 님 | 대구시 남구
이달의 좋은생각
[햇살 마루] 곁을 준 사람
2018.01.08   조회수 : 857    댓글 : 1개
이제 다섯 살이 되는 딸아이는 잠들기 전에 종종 책을 들고 내 방으로 와서는 읽어 달라 한다. 어느 날 함께 책을 읽는데 폭풍우와 번개가 나왔다. 아이가 번개를 무서워하기에 나는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며 달랬다. 번개가 치는 날이면 불꽃놀이를 보듯 아빠와 함께 보자고 했다. 그러자 아이가 겁먹고 쓸쓸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그때 아빠가 없으면 어떡해?” 나는 아이를 꼭 껴안았다.아버지는 내가 중학생일 무렵 트럭 행상을 시작했다. 워낙 소농이었던 터라 농사라고 할 것도 없었지만 그나마 유일했던 두어 마지기의 논을 팔아 버린 뒤 1톤 중고 트럭을 구입했다.트럭 행상이 만만할 리가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트럭을 몰고 이 마을 저 마을을 떠돌았지만, 농사를 짓던 때보다 살림이 나아지기는커녕 외려 기우는 듯했다. 아버지의 실패를 증명이라도 하듯 집 안 곳곳에 팔지 못한 물건만 쌓여 갔다. 옷, 그릇, 신발 따위가 쌓이는 건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이 모든 실패에도 교훈을 얻지 못한 아버지는 트럭 짐칸에 닭장을 짜고 닭을 팔러 다녔다. 그 닭의 대부분은 우리 집 닭장에서 늙어 갈 수밖에 없었다. 다음으로 아버지는 트럭 짐칸에서 닭장을 헐어 내고 커다란 함지박에 닭 내장을 싣고 다녔다. 가스통에 주물 버너를 연결해 솥까지 얹었다. 이 장사가 시원찮았던 건 우리 식구에게 재앙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남은 닭 내장을 처분할 사람은 우리뿐이었기에 하루 세 끼를 닭 내장 볶음으로 때웠다. 얼마 못 가 닭이라는 말만 들어도 구역질이 날 지경이 되고 말았다.그렇지 않아도 사춘기를 지나는 터라 무척 신경질적이었던 나는 기울어 가는 집안 형편이 한심하다 못해 불쑥불쑥 화가 치밀곤 했다. 이러다가 정말 집안이 꼴깍 몰락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두어 번 어머니를 대신해 아버지의 조수 노릇을 하며 트럭 행상을 따라다닌 적이 있었기에 아버지가 장사에는 영 젬병이라는 걸 잘 알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트럭을 처분하고 오롯이 농사만 짓던 시절로 되돌아갈 생각은 없어 보였다. 아버지는 어떻게든 식구를 먹여 살려야했기에 실패를 거듭해도 부단하게 새로운 상품을 물색했다.어느 해 초겨울, 감기에 걸린 어머니를 대신해 아버지를 따라나서야 했다. 아버지가 김장철 대목을 노리고 젓갈을 다루기로 마음먹은 날이었다. 깨어나 보니 이제 막 자정을 넘긴 참이었고 바깥은 옴팡지게도 추웠다. 조수석에 오른 나는 꾸벅꾸벅 졸면서도 아버지가 졸음을 몰아내려는 듯 이따금 손바닥으로 눈두덩을 문지르는 걸 보았다. 두어 시간을 달려 여수 수산 시장에 도착했을 때에도 여전히 어둡고 차가운 새벽이었다. 아버지가 경매로 젓갈을 구입하는 동안 나는 조수석에 그대로 남아 달달 떨면서 자다 깨다를 되풀이했다.어느새 희부옇게 먼동이 터 왔고 트럭 짐칸에 여러 종류의 젓갈 상자가 그득 쌓였다. 그때부터 장사는 시작인 셈이었다. 여수에서 집까지 돌아가는 동안 우리는 국도 변 모든 마을에 들러 젓갈을 팔았다. 마을 회관에 트럭을 세우면 아낙들이 나와 젓갈을 살펴보며 흥정을 했고, 거래가 이뤄지면 아버지와 나는 젓갈 상자를 어깨에 지고 그 집 부엌까지 옮겨다 주었다. 젓갈 장사는 제법 성공적이어서 오후 무렵에는 몇 상자밖에 남지 않았다. 아버지와 나는 이미 젓갈 냄새에 흠뻑 젖었다.어느 마을에서 눈 밝은 아주머니 한 분이 물었다. “오메, 아저씨! 손가락은 어찌된 거라우?” 나는 퍼뜩 정신이 들었고 곁눈질로 아버지의 표정을 살폈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의외로 흔흔했다. “탈곡기에 먹혔어라우.” 혀를 차던 아주머니는 나를 힐끔 보았다. “아들이어라?” “예, 아들이어라.” “아따, 야무지고 똑똑허게 생겼다. 든든허시겄어라.” 그 말치레에 대답하지는 않았으나 아버지의 얼굴은 오후의 식은 햇살 아래서도 유난히 해사했다.겨울 해는 짧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어두웠으나 아버지는 트럭 짐칸이 텅텅 비었으므로 만선의 기쁨을 안고 귀항하는 어부처럼 흥겨워했다. 나는 귓가에 맴도는 아주머니와 아버지의 목소리를 곱씹었다. 문득 그날 새벽 아버지가 경매로 젓갈을 구매하는 동안 조수석에 혼자 남아 자다 깨다를 되풀이하면서도, 어둠에 잠겼던 바다가 기지개를 켜며 부풀어 오르는 걸 보았음을 깨달았다. 운전석에 올라타던 아버지에게서 이미 물씬 밴 젓갈 냄새를 맡았던 것도 깨달았다. 잠든 나를 깨우지 않기 위해 홀로 트럭 짐칸에 그 많은 젓갈 상자를 실었던 아버지,젓갈 냄새를 조금이라도 털어 버리기 위해 차가운 바깥에서 한동안 바람을 맞으며 기다렸던 아버지, 그러면서 조수석 차창으로 잠든 나를 들여다보았을 아버지가 선연히 떠올랐다.내가 잠든 동안에도 나를 지켜보던 누군가는 아버지일 수밖에 없었고, 나는 비몽사몽간에 아버지와 시선을 맞추고는 알 수 없는 안도감을 느끼며 다시 잠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 거였다.나는 고개를 돌려 아버지의 옆얼굴을 보았다. 아버지는 멀리 떠나는 중이었다. 탈곡기에 손가락을 잃은 뒤 천천히 조금씩 거기에서 멀어지는 중이었다.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무섭고 쓸쓸해서 다시 갈 수가 없는 거였다. 다시는 손가락을 잃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아버지는 당신이 떠나온 그곳, 오롯이 농사만 짓던 시절에 대한 두려움과 그리움을 품은 채 당신이 잘할 수 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트럭 행상이라는 미지의 세월로 끈질기게 항해해 가는 중이었다.손홍규 님 | 소설가
이달의 좋은생각
[오늘의 만남] 오천 원이면 충분해
2018.01.04   조회수 : 835    댓글 : 1개
갑자기 사위가 어두워지더니 비가 쏟아졌다. 마침 아이가 학교를 마칠 시간이었고, 나는 서둘러 우산을 챙겨 데리러 갔다. 아이는 학교 정문과 가장 가까운 건물 처마 밑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미안해, 아빠가 좀 늦었지?” “괜찮아.” 아이는 뾰로통한 표정을 애써 감추며 내가 건넨 우산을 펼쳤다. 우리는 학교 앞 핫도그 가게를 지날 때까지 아무말이 없었다. 가게 앞에는 우산을 쓴 아이들이 어느 때보다 공손하게 자신의 핫도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아이는 군침을 삼키며 말했다.“핫도그 맛있겠다.”기분도 풀어 줄 겸 하나 사 줄까 하다 용돈으로 먹으면 되지 않느냐고 물었다. 아이는 이번 주에 용돈을 하나도 안 썼지만, 남은 게 없다고 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하나도 안 썼다며?” “개똥이(가명)가 컵라면이 먹고 싶은데 돈이 없다면서 빌려 달라고 했어.” “컵라면이 얼마나 한다고. 빌려주고도 남았을 거 아니야?” “천 원짜리가 없어서 오천 원짜리 그냥 줬지.” “뭐? 그냥 줬다고?” “어, 안 갚아도 된다고 했어. 나는 어차피 다음 주에 용돈 또 받을 거잖아.”나는 말문이 막혔다. 아이는 대체 뭐가 문제냐는 표정이었다.“그래도 그렇지. 컵라면만 사 주지 왜 오천 원을 통째로 줘?” “나는 컵라면이 안 먹고 싶었고 천 원짜리도 없었으니까.” “네 말도 맞는데, 용돈이 남으면 모았다가 네가 갖고 싶은 걸 살 수도 있잖아.” “난 갖고 싶은 게 없는데?” “나중에 생길지도 모르잖아.” “그건 나중 일이잖아.”더는 할 말이 없었다. 아이의 용돈은 일주일에 오천 원인데, 하나도 안 써서 다음 주로 고스란히 이월되거나 아니면 하루 만에 다 쓰곤 했다. 친구들한테 컵라면이나 아이스크림 따위를 사 주거나, 문방구 앞 뽑기로 탕진하거나. 아이는 아직 용돈을 규모 있게 쓰는 법을 모른다. 나는 말했다.“그래, 잘했다. 근데 너 용돈 안 부족해?” 아이는 세상을 다 가진 표정으로 말했다. “괜찮아. 일주일에 오천 원이면 충분해.” 어느새 비는 그쳤고, 아이는 용돈 받아서 핫도그를 사 먹겠다고 했다.권용득 님 | 만화가
이달의 좋은생각
[좋은님 에세이] 키우는 재미
2018.01.04   조회수 : 821    댓글 : 1개
스물다섯에 들어간 첫 직장을 2년 만에 그만두었다. 하고 싶은 일을 찾고 싶었다. 그런데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내기란 쉽지 않았다. 2년 가까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했다.부모님은 사 남매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하는 모습을 보고서야 그토록 바라던 귀농을 했다. 이제야 짐을 내려놓고 농사일을 하는 부모님에게 면목이 없었다. 닥치는대로 이력서를 넣어 겨우 회사에 들어갔다.첫 출근을 하고서야 알았다.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은 따로 있다는걸. 바로 글쓰기였다. 어렵게 이룬 재취업이었으나 꿈을 놓고 싶지 않았다.집에 돌아가니 부모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첫 출근 어땠어?”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말했다. “별로 할 말 없어. 그만두고 왔거든.” 부모님 얼굴이 굳으며 정적이 흘렀다. 일 초가 일 년처럼 흘렀다. 아버지는 한숨 쉬며 말했다. “이제 다 키운 줄 알았더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드디어 자식들에게 해방되나 싶던 부모님에게 다시 큰 짐을 지운 듯했다. “아직도 키우는 재미를 주네.” 아버지의 뒷말에 깜짝 놀랐다. 호되게 나무랄 줄 알았는데…….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크는 데까지 커 봐. 옆에서 잘 지켜봐 줄 테니까.” 아버지는 이제 다 커서 해 줄 게 없을 듯해 내심 적적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농사든 자식 농사든 이래저래 손이 많이 가야 일하는 맛이 난다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작가 지망생이 된 지 벌써 일 년. 이렇다 할 성과가 없어 초조할 때면 부모님 말을 떠올린다. 혼자가 아니라는 든든함이 내일을 향해 달려갈 힘을 주기에.최정인 님 | 서울시 송파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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