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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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좋은생각

[오늘의 만남] 오천 원이면 충분해

갑자기 사위가 어두워지더니 비가 쏟아졌다. 마침 아이가 학교를 마칠 시간이었고, 나는 서둘러 우산을 챙겨 데리러 갔다. 아이는 학교 정문과 가장 가까운 건물 처마 밑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미안해, 아빠가 좀 늦었지?” “괜찮아.” 아이는 뾰로통한 표정을 애써 감추며 내가 건넨 우산을 펼쳤다. 우리는 학교 앞 핫도그 가게를 지날 때까지 아무말이 없었다. 가게 앞에는 우산을 쓴 아이들이 어느 때보다 공손하게 자신의 핫도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아이는 군침을 삼키며 말했다.
“핫도그 맛있겠다.”


기분도 풀어 줄 겸 하나 사 줄까 하다 용돈으로 먹으면 되지 않느냐고 물었다. 아이는 이번 주에 용돈을 하나도 안 썼지만, 남은 게 없다고 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하나도 안 썼다며?” “개똥이(가명)가 컵라면이 먹고 싶은데 돈이 없다면서 빌려 달라고 했어.” “컵라면이 얼마나 한다고. 빌려주고도 남았을 거 아니야?” “천 원짜리가 없어서 오천 원짜리 그냥 줬지.” “뭐? 그냥 줬다고?” “어, 안 갚아도 된다고 했어. 나는 어차피 다음 주에 용돈 또 받을 거잖아.”


나는 말문이 막혔다. 아이는 대체 뭐가 문제냐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컵라면만 사 주지 왜 오천 원을 통째로 줘?” “나는 컵라면이 안 먹고 싶었고 천 원짜리도 없었으니까.” “네 말도 맞는데, 용돈이 남으면 모았다가 네가 갖고 싶은 걸 살 수도 있잖아.” “난 갖고 싶은 게 없는데?” “나중에 생길지도 모르잖아.” “그건 나중 일이잖아.”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아이의 용돈은 일주일에 오천 원인데, 하나도 안 써서 다음 주로 고스란히 이월되거나 아니면 하루 만에 다 쓰곤 했다. 친구들한테 컵라면이나 아이스크림 따위를 사 주거나, 문방구 앞 뽑기로 탕진하거나. 아이는 아직 용돈을 규모 있게 쓰는 법을 모른다. 나는 말했다.


“그래, 잘했다. 근데 너 용돈 안 부족해?” 아이는 세상을 다 가진 표정으로 말했다. “괜찮아. 일주일에 오천 원이면 충분해.” 어느새 비는 그쳤고, 아이는 용돈 받아서 핫도그를 사 먹겠다고 했다.

 

권용득 님 |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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